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일 Feb 23. 2022

꽃을 피어 올린 날

작은 아이가 거실에서 한참 CD로 '홍길동전'을 듣고 있다가 방에 있던 나에게 뛰어들어왔다. 아이는 뭔가 비밀을 알아낸듯한 표정으로 또박또박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엄마, 길동이는 똑똑해서 공부를 잘했대."

"응, 맞아. 그런데?"

"근데 길동이 아빠는 일반적인 사람인데 길동이 엄마는 있잖아, 종이래...! 색종이...!!!"


 

아이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곤 끅끅거리며 웃고 말았다. 너무 크게 웃으면 민망해할까 봐. 아이는 동화를 들으면서 실제로 종이 접기를 하고 있었다. 너무 몰입하고 있었던 걸까. 그래도 그렇지. 길동이 엄마를 순식간에 색종이로 만들어버리다니.




아이는 종이 접기를 참 좋아한다. 무언가 좋아한다는 것의 뜻은 그만큼 많이, 자주 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그 작은 손엔 색종이가 쥐어져 있었다. 작년에는 4천 장 짜리 색종이 한 박스를 다 비웠다. 어릴 적 내게 색종이는 빨주노초파남보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10장짜리 단면 색종이 한 묶음이 전부였는데. 종이 접기를 좋아하는 조카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아이들 고모는 어느 날 4천 장 들이 색종이 한 상자를 통 크게 선물하셨다. 말이 4천 장이지, 그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아이에게 색종이 상자는 마치 써도 써도 계속 나오는 화수분 같은 것이었다.  



엄마, 이건 기가노토 사우르스고 얘는 메갈로돈, 메갈로돈이야!


엄마, 엄마! 이 티라노사우르스가 셀 것 같아, 아니면 이 스피노사우르스가 셀 것 같아?



아이는 혼신의 힘을 다해 접은 색종이를 내 얼굴 앞에 디밀며 호응해주길 원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의 구별이 어렵다. 모든 것들이 하나같이 '종이접기 한 거'로만 보이니 대답도 영혼이 없을 수밖에. 와, 멋지다! 진짜 잘 만들었는데?! 나의 대답과 반응은 딱 여기까지다.   



잘 접은 종이접기 완성작들은 앙증맞고 예쁘다. 하지만 매일매일 아이가 접어대는 양이 워낙 많으니 나중에는 보기만 해도 스트레스였다. 식탁 위나 거실 바닥, 문 뒤나 소파 밑 여기저기에서 종이 곤충들이 튀어나왔다. 종이의 뒤처리도 문제였다. 그것들을 바로 쓸어 담아 버리기엔 공들여 만든 아이의 얼굴이 떠올라 고민이었다. 하지만 아이의 손길이 닿았다고 모든 것을 다 끌어안고 살 순 없었다. 며칠이 지나도 집 안 곳곳에 나뒹구는 색종이들은 아이가 유치원에 가 있는 동안 몰래 재활용 통에 넣곤 했다.



사실 아이가 종이접기를 계속할 수 있도록 큰 지지와 격려를 받은 곳은 집보다는 아무래도 유치원이었을 것이다. 집에서는 아무리 잘 접어도 두 살 많은 형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형은 동생을 경쟁 상대로 보지도 않지만 동생은 그런 형이 접는 것은 뭐든 다 따라 접으려 했다. 하지만 손이 아직 덜 여문 탓에 형보다는 완성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제 뜻대로 종이가 접히지 않으면 어깨를 들썩이며 서럽게 울어댔다. 그러면 엄마인 나는, 어렵고 힘들면 그만 접어도 돼.라고 말해보지만 녀석은 자존심이 상한지 종이를 더더욱 꽉 붙잡고 손에서 놓지 않았다. 모양은 조금 이상해도 마지막 단계까지 스스로 도달하는 불굴의 의지를 보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유치원에서만큼은 선생님들이나 친구들에게 언젠가부터 종이접기 실력자로 통했다.       



어느 날, 아이는 의기양양 만면에 웃음을 띠며 선포하듯 말했다.


"엄마, 우리 유치원에 종이접기 삼총사가 있어."

"그래? 삼총사가 누구야?"

"A랑 B랑 그리고 나."

"그렇구나. 대단한데?"

"그런데 별명이 다 달라."

"어떻게 달라?"

"A는 종이접기 선수야. B는 종이접기 고수고. 그리고 내 별명은 뭔지 알아?"

"뭔데?"

"나는 말이야. 종이접기 '신'이래, 신!"



그 말을 듣던 순간에도 어찌나 웃기던지. 도도해진 아이의 얼굴 앞에서 속으로 웃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뻥이 심한 유치원 아이들끼리의 대화가 우습고도 귀여웠다.



그 말을 듣고 한참 후에야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이는 아무리 종이 접기가 좋아도 봐주고 인정해주는 대상이 없었다면 진작에 그만뒀을 것 같다. 유치원을 다니며  좋아하는 일을 잘하는 일로 성장시킨 아이의 노력이 가상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 곁에는 아이를 기대하는 눈길로 바라봐 준 친구들과 잘한다고 진심으로 칭찬해주신 선생님이 함께였을 것이다. 나는 미안했다. 엄마는 네가 접은 종이들을 '예쁜 쓰레기' 취급만 했는데.




유치원이라는 작은 세계. 그 세계를 어제 아이가 졸업했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졸업식에는 가족들이 참석할 수 없었다. 아이가 졸업하는 장면을 직접 보지 못한다니 내심 서운하고 아쉬웠다. 그래도 2년 전, 코로나가 터진 직후 졸업식조차 하지 못한 큰 아이보다는 나은 상황이라 위안 삼았다.



졸업식 전날. 비로소 실감이 났다. 아, 내일이 마지막이구나. 하고 말이다. '마지막'이란 시간의 언어는 힘이 참 크다. 무엇인가 행동하게 한다. 선생님께 그리고 아이에게도 더욱 의미 있는 졸업식으로 기억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그동안 전적으로 믿고 아이를 맡길 수 있었던 선생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내가 일일이 알지 못해도 아이에게 분명 많은 애정과 관심을 쏟아부어주셨던 선생님이셨다. 어린 시절, 선생님이 해주셨던 어떤 칭찬 한 마디는 평생 동안 마음속에 간직된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 자신이 가는 길이 맞는지 흔들릴 때마다 그렇게 간직된 말들은 다시 꺼내어 먹는, 영혼의 비타민이 된다.





종이 접기로 칭찬을 많이 받았던 아이가 정작 선생님께는 접어 드린 것이 없었던 것 같다. 아이는 선생님께 드릴 선물로 꽃을 접었다. 선명하게 빨간 장미꽃을 접었다. 그 옆에서 나는 꽃을 붙일 카드를 만들어 주었다. 앞면엔 꽃을 붙이고 뒷면엔 담임 선생님께 손 편지도 썼다. 아주 짧고 굵게. 글로 마음을 표현하는 데 서툰 아이는 대신 장미꽃 한 송이 접기에 정성을 다했다.  



아이를 따라 나도 한 번 꽃을 접어 보았다. 손이 접는 동안 마음은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단계, 한 단계씩 과정을 모두 거쳐야 완성이 되는 종이접기. 그렇게 하루하루, 징검다리 건너듯 유치원이라는 작은 세계를 건너온 아이가 크게 보였다.



유치원에서 아이는 날마다 어떤 표정과 마음이었을까. 그제야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그곳에서의 시간들이 애달프도록 궁금해졌다. 작고 어리게만 보였던 아이가 실은 겹겹이 꽃잎을 감싸 안은 꽃봉오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봄부터 겨울까지, 사계절을 건너 그 꽃은 새로운 시작을 바라보며 서서히 피어나고 있었다. 사부작사부작. 아이의 손길 안에서 새로 피어난 종이꽃처럼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겨울 빨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