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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일 Mar 08. 2022

겨울 빨래

겨울 내내 빨래를 방 안에서 말렸다. 빨래 건조기가 없는 나는 겨울이면 내가 자는 방을 간이 건조실로 쓴다. 겨울 빨래를 말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작은 빨래 건조대와 제습기, 그리고 방 문을 꼭 닫아두는 것이다. 문을 계속 닫아 두어야 빨래가 잘 마른다. 건조대에 널기는 모자라 방 안 장이며 문고리에 걸쳐둔 빨래들의 어수선한 모양새도 감출 수 있고.



온도가 낮은 겨울이나 습도가 높은 장마철이면 빨래를 말리는 일이 쉽지 않아 건조기를 얼른 들이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찾아 올 봄이나 가을 햇빛에 빨래를 널고 걷는 일이 좋아 그런 욕구는 계절이 바뀌면 또 사라진다. 사실 빨래 너는 일은 그냥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내가 맡고 있는 집안 일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일일 것이다.



남동향인 우리 집은 베란다 쪽에 햇빛이 오전에만 머물다 사라진다. 사라지기 전까지, 빛이 가장 충만히 퍼져있는 시간에 나는 빨래를 널곤 했다. 이런 날들의 베란다는 열에 잘 달구어진 오븐 같다. 세탁기로 때를 벗은 채 오그라든 옷가지들은 베란다 오븐에서 눅눅한 습기는 날려버리고 저마다의 모양으로 구워지기 시작한다.



늦은 오후 '땡' 소리와 함께 햇빛이 꺼지면, 나는 잘 구워진 옷들을 줄줄이 집 안으로 들인다. 여러 가지 옷 중에서도 면이나 청 소재로 된 바지들은  구워진 빵처럼 특히 바삭바삭하다. 입으로 맛보는 식감 대신, 손으로 만져보며 촉감을 느낀다. 큰 아이는 어릴 때, 이렇게 마른 바지들을 입에 물고서는 뜯어먹는 흉내를 내며 장난치곤 했다.



고온의 볕 아래서, 잘 마른 빨래는 후각도 자극한다. 햇빛 냄새를 품고 있는 마른빨래들. 세제와 섬유유연제 냄새만으로는 다 담지 못하는 그 고유한 냄새. 맑은 날, 햇빛이 있는 곳 아래 맡았던 공기 냄새가 마른빨래에서 난다. 엄마 손에 착착 개어져 반듯하게 접힌 옷들을 꺼내 입을 때마다 맡았던, 어린 시절의 냄새가 난다.



삼월임에도 여전히 빨래를 방 안에 말리고 있다. 세탁기에서 막 빠져나온 옷들이 무겁다. 물을 먹기도 했지만 겨울 옷이란 게 사계절 중 가장 두껍고 아이들 내복까지 가짓 수가 더해져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묵직한 옷들을 일일이 펴서 옷걸이에 먼저 건다. 건조대 위에 바로 포개어 너는 것보다 이렇게 해야 빨리 마르기 때문이다. 빨래 건조대에는 얇은 속옷이나 양말, 아이들 내복 바지를 포개어 넌다. 널기를 마치고 빨래 곁에 제습기를 튼다.



제습기 물받이에 가득 찬 물을 자주 비워주는 일도 내 겨울 빨래의 중요한 과정이다. 하루 이틀 새 넘칠 듯 채워진 물통이 신기하다. 제습기는 축축한 물기를 빨아들이고 방 안 빨래들은 점점 가벼워진다.



빨래가 마르는 동안 나도 잠깐 낮잠을 잤다. 방 문은 닫혀 있었고 제습기는 옆에서 윙윙 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제습기 덕분인지 겨울 내내 이불이 보송보송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누웠는데 제습기를 끄지 못하고 잠이 들어 버린 것이다. 잠깐 자고 눈이 번쩍 떠졌는데, 내 안에 무언가 제습이 된 듯 개운했다.  


  

사실 마음이 축축해져 있었는지 모른다. 몸속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어떤 모양인지 눈에 보이지 않아서 돌보기 힘든 마음. 겨울을 보내는 동안 눅눅해진 채 방치된 방은 없는지, 곰팡이라도 피어있는 그늘진 구석이 있는 건 아닌지. 내 마음 집 역시 바싹 말릴 수 있는 빛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가운 봄을 그렇게 정돈된 마음속에 오래도록 걸어두고 싶다.  



봄볕에 베란다 온도가 한껏 오르면 이 수고로운 겨울 빨래 루틴도 한동안 잊은 채 살 것이다. 햇빛에 직접 빨래도 말리고, 마음도 말릴 수 있는 그런 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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