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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일 Apr 06. 2022

힘껏 사랑한 삶은 후회가 없을 거라고

밤 10시가 넘자, 토끼 얼굴 스탠드 하나만 켜 두고 아이들 방에 소등을 했다. 큰 아이는 자기 자리에 눕더니 금세 곤히 잠들었다. 작은 아이는 형이 잠든 뒤에도 한참 동안 옆에 누운 내게 종알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나도 입을 다물고. 사방이 고요해지자, 내 배 위로 아이 발 하나가 슬쩍 올라온다. 아이가 이제 진짜 자겠다는 사인을 보낸 것이다.



아이는 감기는 눈꺼풀을 하고서도 작고 애처로운 목소리로, "발..."이라고 한다. 평소처럼 발바닥을 긁어달라는 줄 알고, 나는 그렇게 해주었다. 그런데 아이는 갑자기 이불 위로 발을 들어 올리더니, 발등 위로 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직접 시범을 보였다. 엄마, 그게 아니고 이렇게, 살살살살.



아이는 다섯 손가락 전부를 쓰는 게 아니라, 검지와 중지 손가락으로만 일정한 리듬을 타며 살살살살 긁어야한다고 했다. 그리곤 엄마, 발바닥 말고 발등을 이렇게 해줘. 하면서 애교 섞인 목소리로 요구한다. 어떤 날은 그렇게 종아리를, 또 어떤 날은 손바닥을 긁어달라 했다. 가끔씩은 발바닥부터 발등, 종아리를 거쳐 손바닥까지 긁어줘야 잠이 들곤 했다.  



하아, 이 녀석을 언제까지 이렇게 재워줘야 하나. 인간 효자손이 되어 군말 없이 아이의 몸을 긁어주다가도, 한 번씩 현타가 온다. 모성애도 식재료처럼 일정 분량씩 소분해 두었다가 냉장고에서 꺼내 쓸 수 있는 거라면 좋았겠다 싶다. 하지만 사랑은 늘 신선하게 저장해두기가 어렵다.



아이에 대한 사랑으로 벅차오르던 마음도, 인내심의 한계를 느낄 때면 금세 바닥난 마음이 된다. 어쩌면 모성애도 매일매일 새로 구하고 채워야 할 '만나'일지 모르겠다. (구약 성서에서,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향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침마다 만나를 새로 받아야 했다. 그것은 기적의 음식이었지만 저장해 둘 수 없었기에.)



하룻밤은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혼자 침대에 누웠다. 아이들 잠자리 준비, 책 읽어주기, 그리고 작은 아이에게 인간 효자손이 되어주기.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잠시 홀가분해져서 깊고 편한 잠에 빠졌다. 그런데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뭔가 마음이 허전했다. 지난밤이 아득하리만큼 길게 느껴졌다. 아이들이 잠든 모습을 하룻밤 확인하지 못했을 뿐인데 이상했다. 아이들이 한없이 보고 싶었다. 사랑이라는 무형의 감정은 이렇듯 불시에, 느닷없이 내게 찾아온다.  



하루 만에 나는 다시 인간 효자손으로 돌아갔다. 밤이 되자, 스탠드 불빛 하나만 은은하게 퍼진 방이 고요해졌다. 잠들기 직전, 작은 아이는 이번에도 발 하나를 내 배 위에 슬쩍 올려놓았다. 살살살살. 아이가 좋아하는 리듬을 기억해내며 발바닥을 손가락으로 긁어주었다. 이 녀석을 언제까지 이렇게 재워줘야 하나. 하는 물음이 내 안에서 비눗방울처럼 또다시 둥실 떠올랐다. 사실 아이가 훌쩍 커버린 어떤 날에는 소멸해있을 질문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어떤 확신이 들었다. 머리로 계산하지 않는 사랑은 분명 후회가 없을 거라고. 마음을 다하고, 마음을 뛰어넘어 힘껏 사랑한 삶은 후회가 없을 거라고. 인생의 끝자락에서 그렇게 후회 없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아이가 잠든 것이 분명했지만 금세 곁을 빠져나올 수  없었다. 긁어주던 손을 멈추었다. 대신 아이의 발바닥에 "사랑해, 잘 자."라고 손가락 글씨를 써주었다. 사랑의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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