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의 하차와 나만의 표정을 찾아서
살면서 나는 여러 번 변신을 꿈꾸었다. 처음에는 외모였다. 조금 더 예쁘고, 조금 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바꾸고 싶었던 것은 얼굴이 아니라 삶의 태도였다.
학창 시절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를 읽으며 니나를 동경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지적이고 열정적이며, 흔들리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삶. 그때의 나는 외적인 모습보다, 삶의 방향과 태도에 더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
생각은 곧 행동이 되었고, 도전은 일상이었다. 원하는 무언가를 이루는 성취의 기쁨부터 실패와 체념, 그리고 고뇌까지도 모두 성장의 일부라 여겼다. 열정으로 충만하던 시간이었다.
그 시절을 지나, 나는 나의 서사를 통째로 바꾸고 싶다는 낯선 상상에 빠진 적이 있다.
브런치 어느 글에서 ‘프랑켄슈타인’이 성형시술을 통해 ‘괴물’이라는 배역에서 하차하는 내용을 다룬 것을 읽었다. 그로 인해 소설의 뒷부분이 백지로 변해버리는 기현상이 일어난다. 평생의 흉터를 지우고 다시 태어남으로써, 자신의 비극적 서사에서 스스로 퇴장해버린 존재의 이야기.
물론 상상이지만, 그 설정은 묘하게 내 안의 어떤 지점을 건드렸다. 나 역시 그 괴물처럼, 내게 주어진 배역을 벗어던지고 완전히 새로운 얼굴로 나타나고 싶다는 유혹을 느낀 적이 있었다.
사실 나는 아직 단 한 번도 성형수술을 받은 적이 없다. 흔한 시술조차 경험해본 적이 없다. 거울 앞에서 눈꼬리를 조금 올려보고, 얼굴을 살짝 끌어당겨보았다. 자잘한 잡티만 정리해도 이미지가 확 달라질 것 같았다. 솔직히, 그런 충동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성형의 순기능을 부정하거나 그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내가 지향하는 변화는 얼굴이 아니라 내가 나를 바라보는 깊은 시선에 있었다.
한때 가수 이효리가 멋있게 느껴졌던 이유도 비슷했다. 화려한 무대 위의 모습보다, 자신만의 매력을 정확히 알고 수수하지만 스타일리시하게 살아가는 태도. 흔들리지 않는 내면에서 비롯된 그 자연스러움이 근사해 보였다.
내가 닮고 싶었던 변신은 더 예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모습이어도 당당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지금의 나는 본성과 노력의 시간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외모는 더 이상 나를 규정하는 중심이 아니다. 다만 변신은 멈춘 적이 없다. 방향이 달라졌을 뿐이다.
화려한 꽃을 피우기 위해 바깥을 향해 뻗어나가던 마음이,
어느 순간부터는 안쪽을 채우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제는 주어진 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가려 한다. 진짜 내가 누구인지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타인의 기대와 기술로 만들어진 가면을 쓴 내가 아니라, 오직 나만의 표정으로 서 있고 싶다.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나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삶.
어쩌면 우리는 어떤 의미로든 한 번쯤은 자신을 지워가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내가 아닌 나로 사는 일은, 결국 나를 지우는 일이니까.
오늘도 나는 안쪽을 향한다.
* 인용 : 잭옵작가님의 글
https://brunch.co.kr/@think4noreason/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