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19호실을 꿈꾸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곳을 찾아서

by 푸른 꽃

멍하니 있어도 되는 곳.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장소.

도리스 레싱의 소설 <19호실로 가다>의 수전이 떠오른다.


수전은 번듯한 집이 있었고, 방도 많았으며, 가족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오롯이 자신만의 장소를 갈망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그녀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19호실, 그 호텔방에서 수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충분히 쉬다가, 창가로 가 양팔을 쭉 뻗고 가볍게 미소 지으며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만큼은 현실 속 여러 역할로부터 벗어나 이름 없는 존재로 머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수전이, 문득 부러워졌다.


살다 보면 나만의 장소는 꼭 필요하다.

어릴 적에는 형제가 많아 방을 가져본 적이 없었고,

결혼 후 겨우 마련한 나만의 방도 오래가지 못했다.

아이의 공부방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머무는 자리는

거실도 아닌, 주방의 식탁이다.


짧은 여행을 떠나도 사정은 비슷하다.

가족들과 같은 공간을 나눠 써야 한다.

그렇다고 수전처럼 호텔방을 따로 드나들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인지 더 자주 상상하게 된다.

동화 속 장면 같은 공간을.


벽난로가 있고, 흔들의자 위에 숄을 무릎에 덮은 채

책을 읽을 수 있는 아늑한 장소,

창밖에는 근사한 나무 한 그루,

눈이나 비가 내리는 풍경을 오래 바라볼 수 있는 곳.


나만의 독립된 공간에는

적당한 빛이 들고,

글을 쓰든 멍하니 있든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한 단출함이 갖춰져 있으면 좋겠다.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조용히 숨을 고를 수 있는 곳.


가끔 찾아오는 손님과 차를 나눌 수 있는 여유까지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식물을 키우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작은 뜰이 있거나,

가까이에 산책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또한 감사할 일일 것이다.


우리 안에는 늘

다시 새로워지려는,

다시 생기를 얻으려는 본능이 있다.


지친 삶 속에서도

스스로를 회복하려는 힘을 깨우고자 하는 의지,

온전한 자신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

그래서 우리는,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공간이 아니라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을 수 있는

자신만의 장소를 찾게 되는지도 모른다.

사람들로 가득한 식당이나 카페가 아닌,

오직 나를 위한

정신적이고 물리적인 자리.


그곳에서 비로소 나는

조용히,

다시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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