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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 언니 Jun 22. 2020

채용 전제 인턴, 이 시대의 희망 고문

Episode 1. 

  우리 팀에 인턴이 들어왔다. 출근하자마자 습관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을 메모하며 정리하고 있는데 문득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오늘 첫 출근한 인턴이 그의 파트 선임과 함께 팀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한 눈에도 엣띤 얼굴에는 긴장에 티가 역력해 보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저도 잘 부탁해요." 같은 형식적인 인사들이 모두 끝나고 자리로 돌아가는데 어딘가 경직되어 보이는 그의 뒷모습에서 낯선 환경에 대한 긴장감이 고스란히 전해 진다.


 나는 몇 년 전 개봉한 '로버트 드 니로'와 '앤 해서웨이' 주연의 영화 <인턴>을 매우 좋아한다. 이놈의 회사 앞뒤 안 보고 확 그냥 때려치우고 싶을 때마다, 슬럼프에 빠지거나 매너리즘에 허우적거릴 때마다 <인턴>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곤 했다. 특히 초반에 주인공이 서툰 조작 솜씨지만 캠코더 앞에 앉아 자신의 지난 경험과 앞으로의 각오, 그리고 본인이 얼마나 그 자리를 원하는 진심을 담아 말하는 부분을 제일 좋아한다. 그 부분만 셀 수 없이 돌려봤다.


 그러면서 '이다음에 나도 나이가 들어서 지금과 모든 환경이 바뀌더라도, 어쩌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과 직무 기술들이 그 시대에는 아주 고루한, 꼰대도 아니요 아예 퇴물 취급을 받더라도, 그래도 지금 이 시간들을 견디면서 쌓은 것들이 앞으로 새롭게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는데 반드시 도움이 될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보자.'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곤 했다.


 

 나도 인턴을 해봤고, 개인적으로 인턴은 참 좋은 제도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관심 있는 분야에서 내가 이 일을 평생 업으로 삼아도 될지 미리 체험해 보면서 적성과도 맞는지 알아볼 수 있는 일종의 소중한 '사전 테스트 기회'니까. 하지만 그 앞에 '채용 전제형'이라는 단서 조항이 붙게 되면 사전 직무 체험이라는 꽃길이 정규직을 위한 서바이벌로 순식간에 바뀐다.


 나는 인턴 제도는 찬성하지만, 채용 전제형 인턴은 반대한다. 가뜩이나 바늘구멍 통과하기처럼 어려운 취업 시장에서 채용전제형 인턴 제도는 정규직 전환의 천재일우 기회지만, 동시에 그를 빌미로 같이 들어온 동기들과의 무한 경쟁, 그리고 무엇보다 제일 최악인 것은 조직 피라미드 서열에서 최하위 약자 포지션에 놓이게 된다는 점이다.


 채용 전제로 들어온 인턴들은 출근에서 퇴근까지 매일 매 순간, 본인들이 평가받고 있다는 압박감에 마음 편할 날이 없을 것이다. 아마 웃어도 웃는  아니요, 먹어도 먹는  아닌 순간들일 것이다. 때로는 인턴으로서 무리한 업무와 부당한 언행, 대우를 당해도 대부분 정당한 거절 의사 표시는커녕 싫은 내색조차 제대로 못하고 "저는 괜찮습니다."라고 말한다. 그것도 웃으면서. 세상에나. 분명  괜찮아 보이는데.


 설상가상인 것은 어디까지나 채용 '전제'지 '개런티(보증)'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턴 종료 시점에 회사 상황에 따라 채용 TO를 아예 없애 버리는 경우도 다반사다. 제 아무리 날고 기며 동기 인턴들을 제치고 온갖 허드렛일까지 앞장서 도맡아 하며 '제일 잘한다. 니가 1등이다.' 소릴 들어봤자 아무 소용없는, 그야말로 승자 없는 게임이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진작 TO가 없다고 속 시원히 말이나 하지. 그럼 당신들의 시덥지 않은 농담에도 절대 웃어주지 않았을 텐데. 나랑은 1도 상관없는 생전 처음 보는 남의 자식 양말 신는 동영상을 30분이나 같이 보며 '잘한다 잘한다' 추임새까지 넣어주지 않았을 텐데.



 물론 그거 누가 공짜로 일 시키냐고. 정당한 보수를 지급했고 자기가 안하면 그만이지, 뭐가 그리 삐딱하냐고 말한다면 그건 그야말로 쥐 앞에서 고양이 똥 배짱부리는 소리라고 말하고 싶다. 일을 시키면서 그에 따른 정당한 보수를 주는 건 디폴트로 당연한 소리고.


 마치 남들은 윤기 흐르는 쌀밥을 맛있게 먹는데 혼자만 까끌한 모래 섞인 밥을 먹으면서 내색도 못하고 맛있게 씹어 삼켜야 하는 상황이라면. '채용 전제' 라는 희망 고문 때문에 하루에도 수백, 수 천번씩 천당과 지옥행 롤러코스터를 타는 마음을 단순히 일에 대한 보수를 지급했으니 괜찮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게 못마땅하면 '그냥 안 하면 되지.'라고 말한다면 '당신 자식이 놓인 상황이라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되물어 보고 싶다.


 점심을 먹고 커피 한 잔을 하는데 아직도 얼어 있는 우리 팀 인턴에게 "편하게 하세요. 저는 평가권도 없어요. 모르는 것 있으면 편하게 물어보세요. 꼭 제 자리까지 안 찾아와도 되고 그냥 메신저로 물어보셔도 돼요."라고 말해주는 것 말고는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일개 개미의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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