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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 언니 Feb 05. 2021

죽기 전에 이 화장품들을 다 쓸 수 있을까?

02. 화장품

 매일 마스크를 쓰기 시작하며, 화장하는 것이 자못 거추장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아니,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전부터 이미 조금씩 번거롭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일상이 된 마스크 쓰기를 ‘참 좋은 구실’로 삼아 매일 기계적으로 하던 행위인 ‘화장’에 본격적으로 제동을 걸었다.


 20대 초반, 외출할 때 메이크업을 하지 않으면 큰 일 나는 줄 알았다. 서투른 솜씨에 조악한 화장품들을 참 열심히 찍어 바르고 학교에 갔다. 수도권에서 서울 중심부로, 무려 2시간 가량의 등교 시간이 필요했던 나는 제 때 채비를 마치려면 수업 시작 3시간 전부터 준비를 하며 부산을 떨어야 했다. 피부 화장에도 공을 들이고, 색조 메이크업에도 엄청난 공을 들였다. 손 떨리는 아이라인 작업과 아무리 열심히 칠해 보아도 제품 광고 모델처럼 한 올 한 올 풍성하고 긴 속눈썹이 도무지 되지 않는 마스카라를 붙들고 거울 앞에서 씨름하다 보면 어느새 30여분이 훌쩍 지나기 일 수였다. 부랴부랴 립을 바르고 치크와 쉐이딩까지 일명 ‘풀 메이크업’을 한 뒤에야 집을 나섰다.


 물론 대학 때 메이크업은 필수나 의무가 아닌 순전히 개인의 선택 사항이다. 노메이크업으로 학교에 등교하는 친구들도 많았지만 나는 뭐랄까, 그냥 화장하는 것이 좋았다. 재미있는 점은 ‘좋아한다’고 해서 결코 ‘잘한다’의 범주에 들어간 것은 아니란 사실이다. 아직 청춘의 꽃, 여드름이 만연했던 20대 초반의 나는 남 보기에 부끄러운 여드름을 메이크업으로 가리기에 급급했다. 무언가를 ‘덜어내기’에 능숙하지 못해 그 당시 사진을 보면 오히려 20대 후반보다 더 성숙해 보이는 외모를 하고 있어 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사회에 나와 잠시 ‘화장품’과 관계된 일들에 엮였던 적이 있다. 그때 잠시 사그라들었던 나의 화장에 대한 열정이 또다시 활활 타오르게 되는데, 한창 내게 샘플로 주어진 화장품들을 또 부지런히 찍어 발랐다. 자고로 내가 다루는 상품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평범한 직장인이라면 감히 시도할 엄두조차 나지 않을 것 같은 컬러들도 과감히 바르고 다녔다.  


 그중 몇 가지 재밌는 에피소드들을 떠올려보면 한창 ‘레드 볼터치’에 빠져있던 나는 유난히 욕심이 과했던 어느 날, 화장실에서 마주친 후배에게 ‘선배님, 더우세요? 아니면 열나시는 것 같아요! 얼굴이 너무 빨개요’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날따라 유난히 붉게 칠한 나의 ‘과유불급’의 양볼이 갑자기 한없이 부끄러워져 얼굴 전체가 불타는 고구마처럼 빨개지자, 당황한 후배가 다급히 나를 회사 양호실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그뿐이랴. 갑자기 자글자글한 펄이 가득 올려진 다크 한 FW색조 컬러들에 취해 벌건 대낮부터 펜더처럼 짙은 스모키를 하고 앉아있는 내게, 옆자리에 후배가 말을 걸려다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난 적도 많았다.  


 그때에 비하면 거의 ‘자연인’ 수준인 요즘에도, 마치 내게 과거의 영광을 잊지 말라는 듯, 안 쓰는 화장품들이 넘친다. 많이 버렸다고 생각했는데도 서랍장을 열거나 파우치를 열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한 움큼씩 비져 나오는 화장품들을 다시 꽁꽁 싸매는데 급급하다. 아무리 과거에 비해 화장품 소비가 줄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계절이 바뀔 때마다 기분 전환용으로 작은 립스틱 같은 것들을 한 두 개씩 사다 보니 당최 줄어들 기미가 없다.


 화장품 총량 보존 법칙이라는 마법에 걸려든 것 같다. 분명 하나를 버렸는데, 다시 하나를 사들여 결국 원점이다. 그러다 오늘 아침, 제법 오래 구석에 치워두었던 C사의 선크림을 꺼내 발라봤다. 그걸 샀을 때는 유명한 브랜드명에 비해 내 피부와는 맞지 않는 것 같아 ‘아 이렇게 또 돈지랄을 했구나’ 싶어 한편으로 치워뒀는데, 오늘 아침에 대충 손으로 쓱쓱 바르고 오후가 되어 거울을 보니 묘하게 평소와 달리 피부에 윤기가 좌르르 돈다. 갑자기 세상 곱디고와 보이는 내 모습에 ‘아니 이게 뭐야’ 싶어 놀라운 마음에 또 그 브랜드에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린다. 이 기세라면 내일도, 모래도 또 그 제품에 손이 갈 것이고 그 다음 날은 C사의 또 다른 제품들을 사러 백화점에 출동하겠지.


 그러다 문득 든 생각.  


 ‘내가 죽기 전에 이 화장품들을 다 쓸 수 있을까?’  


  화장품이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아직 가지지 못한 것들을 더 가지고 싶은 욕망에  여전히 몸부림치는 요즘이다. 느낌상 앞으로 몇 년간은 일절 색조 화장품을 사지 않아도 거뜬할 것 같은 나의 전리품들을 보며 생각한다. 나는 이미 많이 가진 것들이 있다. 그럼에도 나는 무엇을 또 가지길 원할까?


 지금은 가지지 못해 안타깝고 간절할 것 같은 것들도, 결국 가지게 되다면, 혹은 시간이 흐르면 고작 책상 한 구석 위에 쌓아두고 켜켜이 먼지나 쌓이는 신세로 전략할지도 모르는 것들을, 나는 오늘도 이토록 간절히 원하는 걸까?


 생각이 많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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