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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 언니 Mar 05. 2021

키오스크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렸어

03. 키오스크

 오랜만에 동네 아이크스림 가게 문을 성큼 밀고 들어갔다. 여느 날과 같이 오색 천연한 31가지 맛들의 아이스크림 진열대 앞으로 다가가 종업원에게 주문을 하려고 막 입을 떼려는 찰나, 종업원의 무언의 손짓을 시선으로 쫓으니 두둥. 키오스크가 있다. '아, 이제 이곳도 키오스크로 주문을 받는구나' 싶어 기계 앞에 서니 낯설음에 순간 긴장됐다. 내가 주문하려는 상품은 총 세 가지 맛을 골라야 했는데, 보통 눈으로 아이스크림을 좇으며 '이거 주세요, 이거 주세요' 주문하는 것이 익숙했던지라 모니터 속에서 그림만 보고 주문을 넣어야 하는 키오스크 앞에서 버벅버벅 거리며 아이크림을 골랐다.


 무사히 주문을 마치고 결제 단계 직전, 그 와중에 제휴카드 포인트 할인을 받겠냐는 물음에 'yes'를 선택하니 바코드를 기계에 스캔하라는 안내 메시지가 떴다. 부랴부랴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제휴 멤버십 앱을 열어 바코드를 띄웠지만 키오스크 어디에 바코드를 스캔하라는 것인지 순간 헷갈려 또 주춤주춤거렸다. 그 사이 내 뒤에 주문 대기 줄이 길어졌고, 어서 비켜줘야 할 것 같은 다급한 마음이 들어 결국 제휴 할인을 포기하고 신용 카드를 꽂아 할인 없이 결제했다. '하, 아이스크림 하나 먹는 것도 쉽지 않구나.' 싶은 마음에 영수증을 쥐고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데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사실 무인 키오스크들은 이제 언제,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을 만큼 주변에서 흔해졌다. 아예 사람 없이 무인으로만 운영되는 가게들도 생겼으니까. 아이스크림을 기다리는 찰나의 순간, 불현듯 유난히 추웠던 어느 날, 동네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에 저녁거리를 사러 들어갔던 기억이 났다. 역시 100% 무인 키오스크로만 주문을 받는 가게였는데 번화한 역 주변에 있어 퇴근길에 나처럼 끼니를 해결하려는 직장인들이 물 밀듯이 밀려오는 곳이었다. 키오스크가 꽤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대기 행렬이 길었는데 바로 앞에서 연세가 지긋한 할아버지 한 분이 주문에 애를 먹고 계신 것 같았다.


 갑자기 무슨 용기가 샘솟았는지 평소라면 절대 나서지 않았을 텐데, 당황한 손짓과 위축된 어깨너머로 느껴지는 긴장감이 바로 내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져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라고 말을 걸었다. 아버지 연배로 보이시는 분은 매장 내 전시된 포스터에 그려진 신상 햄버거를 가리키며, '저걸 좀 주문하고 싶다고' 말씀하셨고 이미 여러 번 그곳에서 주문해본 경험이 있는 나는 번개처럼 손을 놀렸다. 사이드 메뉴와 음료까지 주문을 하고 포장해 가신다고 하시길래 야무지게 테이크아웃을 눌러 결제까지 도와드리고 곧이어 내가 주문을 했다. 매장 내 좌석에 앉아 대기를 하는데 여전히 그분이 영 신경 쓰였던 나는, 내 옆에 나란히 앉아계신 그분의 영수증을 어깨너머로 훔쳐보며 전광판에 주문 번호가 뜨는지 같이 살펴보다가 그분의 번호가 뜨자 총알같이 알려드렸다.


 환하게 웃으시며 고맙다고 말씀하시고 매장을 나가시는 낯선 이웃을 보며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갑자기 어린이가 동네방네 소문낼 선행상 탈 일이라도 한 것 같아, 이미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임에도 '착한 일'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햄버거 가게에서 어르신을 도와드렸다고 말하니 '잘했다는' 엄마의 칭찬에 둠칫 둠칫 어깨가 들썩였다. 가열차게 "만약에 그분 나 아니었으면 사람들 밀려오니까 주문 포기하고 그냥 가셨을지도 몰라"라고 말하니 그 말을 듣던 엄마가 나지막이 "그래 잘했네. 사실 엄마도 그래서 그냥 나온 적이 있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사람들이 자꾸 오니까 그냥 나왔지 뭐야"라고 말씀하셔서 갑자기 방정맞게 들썩이던 어깨가 일순간에 움직임을 멈췄다.


 "아...... 엄마......"  


  아니 이럴 수가. 하긴 어딜 가든 샤이한 소녀 같은 우리 엄마라면 가게에 상주하는 직원을 불러 도움을 청해 주문을 하는 대신 조용히 물러나 나왔을 것이다. "엄마 그럴 때 가게에 있는 사람이나 뒤에 있는 젊은이들한테 좀 도와달라고 하지. 왜 그냥 나왔어. 힝 ㅠㅠ" 하늘을 둥둥 떠다니던 솜사탕 같은 기분이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나는 정작 내가 도움을 줄 수 없었던 엄마에게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괜찮아. 다음에 먹지 뭐. 빨리 가서 저녁 맛있게 먹어"라고 말하는 수화기 너머 엄마에게 나는 더 이상 뭐라 해줄 말이 없었다.


 키오스크 주문을 어려워하는 엄마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과 속상함, 내가 남의 주문을 도와주었다는 뿌듯함. 무인 키오스와 그렇게 얽혀있던 나의 경험에 오늘은 낯선 아이스크림 주문용 키오스크 앞에서 어찌어찌 주문은 했지만 야무지게 할인 혜택까지 챙기지 못한 '반쪽짜리 성공'을 거둔 나에게 '낯선 기계 앞에서 당황스러움. 난처함' 이란 기억이 추가됐다.


 몇 년 전 마케터로 일하며 온갖 오프라인 행사를 기획해야 했을 때, 나의 업무 리스트에는 '키오스크 대여 고려'란 옵션이 늘 있었다. 현장 운영 인원의 인건비를 줄이고, 동시에 '세련되고 앞서가는, 디지털 행사 현장'이라는 느낌을 고객들에게 주기 위해 이벤트용 무인 키오스크를 사용하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키오스크 일 대여료가 비싸서 망설여졌다. 또 키오스크 내부에 넣어야 하는 시스템(콘텐츠) 역시 우리가 기획한 행사에 맞게 커스터마이징해야 했기 때문에 ROI를 따져보니 그냥 알바를 몇 명 더 쓰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계산이 스자, 아쉬웠지만 키오스크 대여를 포기했다.


 그때 나는 사용자 입장이 아닌, 철저히 운영자(경영자) 입장이었다. 아마 현재 거리에 점점 개체수를 늘려가고 있는 100% 무인 상점들도 나와 같은 마인드에서 생긴 현상들이 아닐까. 오너 입장에서는 잠도 안 자고, 딴짓도 안 하고 인건비 투쟁도 없는 기계로 샵을 운영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고 안정적이라 나 같아도 소자본 창업을 준비한다면 '가성비' 측면에서 무인 가게는 몹시 구미가 당기는 사업 아이템 이라고 느껴질 것 같다.


 가끔 사회면에서 디지털 소외 계층, 디지털 취약 계층에 대한 이야기들이 등장하지만 나는 줄곧 그것들을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대학교육에 대학원 공부까지 한 속된 말로 '배울만큼 배운 내가' 이렇게 처음 보는 키오스크 앞에서 버벅거리며 당황해 얼굴이 홍시감처럼 달아오를 줄도 몰랐고, 내 어머니가 먹고 싶었던 음식 주문을 포기해야 하는 날이 올지도 몰랐다. 반대로 '원래 사회는 그렇게 늘 변하는 것이라고, 변화에 개인이 알아서 눈치 빠르게 적응해야지. 어디서 징징거리느냐'는 따끔한 의견들도 팽팽한 요즘, 나는 어느 진영에 서야 할지 갈피를 잃었다. 평소 '적자생존. 변화에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는다'란 마인드가 강했는데 이제 내가 변화에 적응하기 힘든 나이가 된 건지, 아니면 나 같은 보통 사람들도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는 건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주문하신 XXX번 나왔습니다"


 나의 번잡한 마음을 종식시키는 종업원의 목소리.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잠시 끊어버리고 집에 돌아와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조금씩 퍼먹었다. 순간의 달콤함에 집중하며 애써 복잡한 마음을 다스려보지만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이 찜찜하다. 미래에 첨단 기술이 상용화되고 내가 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나는 언젠가 이 달콤한 아이스크림 사먹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날이 올까? 아, 상상만해도 아찔하고 서럽다.   


 그러니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젊은이들, 그때 머뭇거리고 있는 나를 보거든 꼭 좀 도와주시구려. 그대들만 먹기에는 아이스크림이 너무 맛있잖소.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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