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없는 세상은 유토피아가 될 수 있을까?
『걸리버 여행기』를 동화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신랄한 풍자가 가득한 성인 우화다. 작가는 상상력이 돋보이는 기괴한 나라들의 모습에 빗대어 현실을 풍자하는데, 그 대상은 국가 간 전쟁과 정치 등 사회 문제, 다양한 신분과 직업의 개인, 심지어는 인간 자체에까지 이른다. 풍자 문학의 최고봉으로 여겨지는 이 방대한 작품 전반에는 '거짓말'에 대한 고찰이 담겨 있다.
실제 체험으로부터 얻은 사실적 정보를 기술하는 '여행기'의 형식을 빌린 것 작품인 것부터가 거대한 거짓말이다. 화자인 걸리버는 사실만을 담아야 하는 '여행기'에 거짓말을 늘어놓는 일이 많다고 비판하면서, 자신의 작품은 분명한 사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내용은 누가 봐도 사실이 아닌 것들로 가득하다. 소인과 거인, 하늘을 날아다니는 성채, 말도 안 되는 것들을 연구하는 학술원, 죽지 않는 존재, 이성을 가진 말이 인간을 지배하는 국가. 공교롭게도 이들은 모두 외부와 단절되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존재들이다. 이미 과학기술에 기반한 산업혁명이 태동하고 있던 1726년, 이 내용들을 사실적인 여행기로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작가는 여행기라는 형식을 빌려 진실된 어투로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그것들이 확고한 사실이라 단언한다.
화자인 걸리버의 이름에도 거짓말의 의미가 들어 있다. '걸'(Gull : 바보 혹은 잘 속는 사람)과 '버'(ver : 진실 혹은 진리)의 합성어로, '진실을 말하는 바보', '진실을 말하는 거짓말쟁이' 정도로 해석이 가능하다. 과거 판본의 걸리버 초상화에는 '레뮤얼 걸리버 선장, 멋진 거짓말쟁이 선생'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고도 한다. 작가는 걸리버의 입을 통해 거짓말을 하면서도, 신랄한 풍자로 그 안에 숨겨진 진실을 드러낸다. 이른바 '진실된 거짓말'로 현실을 고발하는 셈이다.
작품에서 주로 풍자의 대상이 되는 중상모략, 사기, 모함 등 인간들이 저지르는 악덕들 역시 거짓말로부터 시작된다. 이에 대한 내용은 4부 '후이늠' 편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고도의 지능과 이성을 가지고 있는 말(馬)들인 후이늠은 거짓과 악덕이 없는 이상적인 사회를 이루고 있다. 이들의 언어에는 ‘거짓말’이라는 단어가 없다. 그들은 거짓말을 ‘있지도 않은 것’이라 표현한다. 걸리버는 후이늠에게 거짓말의 개념을 설명하는 데 애를 먹는다. 대화는 서로를 이해하고 사실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기 위한 것인데, 누군가 거짓말을 한다면 대화의 목적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에 거짓말이라는 게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후이늠의 생각이다. 그런 후이늠은 인간의 거짓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일삼는 인간을 비이성적이지만 이성적인 척하는 미개한 존재로 취급한다. 실제로 후이늠의 지배 하에 살아가는 '야후'라는 지저분하고 추악한 생각과 행동을 일삼는 유인원 종족이 있는데, 이들은 다름 아닌 인간이다. 후이늠에게 멸시받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동물과 인간의 입장을 뒤집어 인간의 추악한 면을 드러내고 풍자하고 있다.
걸리버는 뛰어난 이성과 덕성을 갖춘 후이늠에게 감화되어 그들의 세계를 유토피아로 받아들이고 후이늠을 동경하며 인간을 혐오하게 된다. 그래서 작품 말미 인간 세상으로 돌아온 걸리버는 인간들의 거짓말, 교만, 미개한 이성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심지어 가족들도 대면하지 않는 것을 보면 다른 인간들로부터 스스로 고립되어 살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조금씩 인간 세상에 적응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는 하나, 인간을 ‘야후’(후이늠이 인간 종족을 가리키는 말로 멸시의 의미가 담겨 있다.)라고 부르고, 후이늠을 잊지 못해 말을 사서 말과 하루 네 시간씩 대화하고, 그것들의 체취에 안정을 얻는 것을 보면 정상적인 생활은 소원한 듯하다. 이러한 비극적인 결말은 소인국과 거인국으로 시작하는 흥미롭고 유머러스한 분위기와는 결이 매우 다르다. 그 많은 위기를 겪으면서도 계속해서 출항하는 모험 정신과 여러 신비로운 국가들에서 적극성과 창의성을 보이던 걸리버는 끝내 인간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후이늠을 그리워하는 정신 나간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걸리버는 거짓이 없고 정직하며 이성적인 후이늠의 세상을 유토피아라고 단정했으나 그것이 사실인지에 대해서는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후이늠이 말하는 거짓말, 즉 '있지도 않은 것'이라는 개념은 상상과 공상을 가능하게 하고 실재와 사실로부터 벗어난 사유를 가능케 한다. 이는 과학과 철학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인간들은 각자의 개성을 가지고 자아를 갖는다. 후이늠들은 명확히 사실인 것만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근거로만 판단한다. 그러니 그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은 눈에 훤히 보이는 것들 뿐이다. 모든 답은 정해져 있으니 토론도 고민도 필요치 않다. 그저 합리적이고 확고한 이성만으로 모든 게 결정된다. 이런 세계는 합리적일 수는 있어도 발전이 없다. 석기를 사용하던 인간이 우주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있지도 않은 것’을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이었다. 더욱이 언어부터가 거짓말의 일종이다. 3부의 라가도 학술원 이야기에서는 대화의 효율을 위해 사용하는 단어를 줄이고자 대화에 쓰이는 물건들을 싸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나온다. 책이라는 단어를 말하고 싶다면 실제 책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식이다. 이를 반대로 생각해 보면 언어야말로 없는 것을 있다고 가정하는 거짓말이다. 이 거짓으로부터 사람 간의 대화가 이루어지고 문학이 탄생한다.
극도의 이성만 따르는 후이늠에는 변화와 발전이 없다. 물론 화자인 걸리버가 후이늠을 유토피아로 여기는 만큼 작중에 후이늠의 그런 단점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변화하지 않는 것의 폐해는 3부의 럭낵에 등장하는 죽지 않는 존재, 스트럴드브러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걸리버는 처음 스트럴드브러그의 이야기를 듣고는 그들의 영원한 생명과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무한의 기억, 지혜, 지식을 부러워한다. 하지만 럭낵의 고관은 그런 걸리버를 비웃으며 스트럴드브러그의 실체를 말해준다. 그들은 젊은 상태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다. 계속해서 나이를 먹어 노화한다. 노화한 인간은 모든 기능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들은 기억도 온전치 않고 생산적이거나 창의적인 생각을 해낼 수 없다. 국가에서는 영원히 사는 이들을 영원히 관리할 수 없으므로 80세가 되면 사망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그들은 경제활동을 비롯한 공식적인 활동을 할 수 없다. 또한 소수인 그들은 주변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사고 배척당하며 고립된다. 또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 언어나 문화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사는 존재들인 것이다. 아무런 변화가 없는 후이늠은 자기들끼리는 잘 살 수 있을지언정 세계 사회 속에서의 운명은 스트럴드브러그와 다를 바 없다. 훗날 교통과 통신의 발전으로 세계가 모두 드러나고 지구촌을 이루는 것을 생각하면 후이늠에게는 미래가 없는 셈이다.
작가가 이러한 '거짓이 없는 세상'에 대한 폐해를 생각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가 걸리버와 같이 후이늠을 유토피아로 여기고 그들의 방식을 인간 세상에 적용하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앞서 언급한 라가도 학술원과 스트럴드브러그의 이야기와 걸리버의 비극적인 결말을 생각하면 완벽한 세상, 유토피아는 존재할 수 없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특히 후이늠 의회가 미개한 야후(인간)를 멸종시키는 방법을 결정하는 장면은 그들이 결코 완전무결하지 않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성을 가진 우월한 존재라는 권한으로 열등한 인종 혹은 종족을 청소하겠다는 위험한 발상은 실제로 훗날 나치의 홀로코스트로 실현되었다. 이런 면면을 보건대 후이늠도 결코 유토피아라고 할 수는 없다.
걸리버가 여행한 국가들은 모두 극단적이다. 너무 크거나 너무 작고, 하늘에서 국가를 지배하거나, 극단의 이성으로 통치한다. 이들 모두 나름의 폐해를 지니고 있다. 유토피아로 묘사되는 후이늠마저도. 작가는 걸리버의 입을 통해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을 통렬하게 풍자하고 비판하면서도, 걸리버가 머무는 가상의 국가들 역시 풍자하고 있다. 후이늠이 작가가 말하는 유토피아라고 보는 해석도 있지만, 나는 위에 서술한대로 세상 어디에도 완벽한 유토피아는 없다는 해석에 한 표를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