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의식을 글로 써낸다면
영국 작가 로렌스 스턴의 『트리스트럼 샌디』는 18세기에 쓰인 현대소설이라 평가받는 작품이다. 당혹스러울 정도의 형식 파괴가 가장 큰 이유인 듯하다. 1인칭 시점인 본 작품 화자는 작품명과 같은 '트리스트럼 샌디'라는 인물이다. 그가 이 작품을 직접 써 나가면서 독자에게 이야기하는 방식인데, 단순한 이야기 전달을 넘어 독자에게 말을 걸며 대화를 시도한다. 부인, 각하, 여러분 등 다양한 호칭을 써 가며 독자와 대화를 하고, 이에 대한 반응이 그대로 작품 일부가 되기도 한다. 특이하게도 대화문은 따옴표 없이 대시 기호(-)로만 구분되며, 한 문장이 네댓 줄을 우습게 넘어간다. 그런데도 내용을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표현 방식도 혼란스럽다. 독자와 대화를 나누다가 샛길로 빠지는 곁다리 이야기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기도 하고, 내용 중 자체 검열을 한답시고 기호로 표시해 누락시키기도 한다. 누락된 부분은 내용이 쉽게 추정되는 부분도 있으나 전혀 예측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독자의 상상으로 채워 넣거나 그냥 넘어갈 따름이다. 그런가 하면 원고가 분실되었다면서 백지로 놓아둔 장도 있고, 갑자기 작품의 줄거리 흐름을 보여 주겠다면서 지렁이 같은 그림을 잔뜩 그려 놓은 페이지도 있다.
무엇보다 독자를 당황케 하는 것은 내용 전개다. 소설을 읽을 때는 머릿속으로 전체적인 줄거리를 정리함과 동시에 세부적인 내용을 이해하며 읽어 나가기 마련인데, 이 작품은 그러한 독서 방식을 허락하지 않는다. 작가는 의식의 흐름에 따르듯 이 이야기를 했다 다른 이야기를 하고, 한참이 지나서 처음에 했던 이야기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제대로 된 결말을 이야기해 주지 않고 끝내 버리기 일쑤다. 시간 순서도 뒤죽박죽이다. 이러하다 보니 줄거리가 무엇인지 도통 파악이 안 되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애초에 줄거리라는 게 제대로 진행되지도 않는다.
작품의 원제목은 『신사 트리스트럼 샌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이지만 트리스트럼 샌디의 인생 이야기는 작품 전체의 10%도 차지하지 않는다. 작품은 트리스트럼 샌디의 부모가 그를 잉태하는 순간부터 시작하는데, 작품의 절반에 이르기까지 그는 태어나지도 못한다. 그가 잉태되어 태어나기까지 그의 아버지와 주변 사람들의 잡담이 대부분의 내용을 차지한다. 이는 그가 태어난 이후도 마찬가지다. 트리스트럼 샌디의 인생보다는 그의 인생 순간순간마다 등장하는 그의 아버지와 삼촌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의 생각과 인생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트리스트럼 샌디의 아버지와 그 주변인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아버지 월터는 자신만의 철학과 신념을 가진 인물로,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여러 주제에 대한 생각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트리스트럼이 태어날 때, 코가 상하자 코에 대한 온갖 이야기들을 끄집어내는가 하면, '실수와 오류로 슬픈 자'를 의미하는 트리스트럼이라는 이름이 지어질 때도 이름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을 구구절절 읊어댄다. 전쟁광인 그의 삼촌 토비와 삼촌의 부하 트림 하사는 전쟁이나 군대, 공성전, 대포 등과 관련된 단어 하나만 나와도 열광하며 마찬가지로 시도 때도 없이 길고 긴 전쟁 이야기를 풀어낸다. 목사 요릭이나 의사 슬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저 각자의 관심사와 생각들을 맥락 없이 늘어놓는 것이다. 다만 이렇게 뒤죽박죽인 내용 속에는 당시 영국 사회에 대한 풍자와 유머가 가득해 정신없는 와중에도 읽는 재미가 있다.
『트리스트럼 샌디』를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작품에 동화되어 가는지, 이런저런 잡생각이 탄산음료 기포처럼 떠올랐다 사라지곤 한다. 특히 다른 작가와 작품들이 생각날 때가 많은데, 일단 유머러스한 문체를 보면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이 떠오른다. 실제로 내용 중 라블레의 작품이 자주 언급되기도 한다. 또한 수많은 주제에 대한 생각을 뒤죽박죽 늘어놓는 점은 몽테뉴의 『수상록』과 비슷하다. 등장인물들의 우스꽝스럽고 개성 있는 모습들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닮았다. 특히 삼촌 토비와 그의 하인 트림이 모형으로 만든 전쟁터에서 진지하게 전쟁 상황에 빠져드는 모습은 영락없는 돈키호테와 산초 그 자체다. 신랄한 풍자와 해학은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의 그것을 연상케 한다. 스턴이 이 작품들과 작가들에게 영향을 받았음은 자명하다. 다만 그것들을 적극 활용하면서도 형식을 파괴하면서 자신만의 개성이 담긴 현대적 작품을 탄생시킨 창의성은 스턴의 능력이다. 스턴은 작품의 등장인물이자 화자인 트리스트럼과 동화되어 작품 안팎, 등장인물과 독자를 넘나드는데, 이런 메타적 작법은 현대문학에서 나타나는 특징으로, 그가 얼마나 시대를 앞서 갔는지 알 수 있다.
『트리스트럼 샌디』를 과연 ‘이야기’ 또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다만 이 작품은 혼돈 투성이인 현실 세상과 인간의 의식을 닮았다. 불규칙적이고 난잡하며 뜬금없다. 그 와중에 또 이해가 되고, 흥미롭다. 성적인 욕망과 암시가 가득하고 부조리와 불합리한 현실은 풍자와 해학, 유머로 긁어댄다. 그렇게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는 채 이리저리 차이고 흘러가며 때로는 본능에 따라, 때로는 이성에 따라, 때로는 그 둘의 얽힘에 따라 생각하고 고민하다 보면 어느새 내가 가려고 했던 지점에 와 있고, 또 어느새 더 멀리 가 있다가 어느새 끝이 나 있다. 삶의 혼돈 속에서 이성을 통해 질서를 찾고자 하지만 때때로 본능에 사로잡혀 길을 잃고 마는 인간의 의식을 글로 써낸다면 이 작품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