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바리즘'으로 낭만주의를 무너뜨리다
『보바리 부인』은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의 초석이 된 작품이다. 플로베르에 앞서 스탕당과 발자크가 사실주의의 시조로 여겨지기는 하지만, 그 둘이 낭만주의와 사실주의를 넘나들었다면 플로베르는 완전한 사실주의 작품을 써냈다. 실제 그 시공간에 들어가 있는 듯 느껴지는 장면 묘사와 함께 통속적인 사상과 행동, 인간의 내밀한 심리와 욕망, 속물적인 세태 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불륜을 저지르는 주인공 보바리 부인의 채워지지 않는 욕망과 욕구불만, 체념, 설렘, 쾌락, 배신, 권태, 분노, 슬픔, 좌절로 이어지는 감정 변화가 대표적이다. 사실적인 서술과 탁월한 묘사는 독자를 망상과 환상에 젖어 끝없이 타락하는 보바리 부인에게 적극적으로 이입하게 만들고, 선량한 남편 샤를 보바리를 오히려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지게까지 한다. 이는 작가의 사실주의적인 작법은 물론 독특한 표현 방식에 의한 효과이기도 하다.
『보바리 부인』에서 시점 이동은 독특하다. 같은 장면에서도 등장인물 간 시점이 자연스럽게 바뀌며 각 인물의 상황과 성격에 따른 시각 차이가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샤를과 엠마가 함께 등장하는 장면이 행복한 순간임과 동시에 권태롭고 괴로운 순간이 되는 이유다. 그 전환이 짧은 시간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짐에 따라 독자는 두 사람의 감정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이와 같은 시점 전환은 한 문단 안에서, 혹은 전체에 걸쳐 이루어지기도 한다. 작품 전체의 흐름으로 보면 프롤로그 격이라 할 수 있는 초반 부에서는 샤를, 그리고 본 내용에서는 엠마, 에필로그 부분에서는 다시 샤를로 시점이 이동한다. 그래서 샤를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초반부에서는 엠마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어렵다. 외모가 매우 아름답고 어려서부터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아 재능과 교양을 갖춘 여인으로만 인식된다. 그러나 둘이 결혼한 뒤 엠마의 시점으로 전개되기 시작하면서, 그녀에 대한 샤를의 시각은 완전히 잘못됐음이 드러난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시골 생활의 권태 속에서 삼류 연애 소설에 빠져 화려한 삶에 대한 선망과 허영이 가득한 여인이었다. 수도원 생활도 모두가 우러러보는 성녀라는 공상에 빠져들며 시작한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녀는 살아오며 관심 가졌던 모든 것에 그러했든 금방 싫증을 내고 권태를 느꼈다. 그러던 와중 샤를을 알게 되었고, 그와 함께라면 화려한 삶이 펼쳐질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결혼한다. 그러나 샤를은 재미없고 평범한 남자였기에 그녀의 욕망을 채워주지 못했고, 결국 엠마는 우울증에 걸려 지내다가 불륜이라는 자극적이고 황홀한 타락의 길에 빠져든다.
줄거리로만 보면 흔한 이야기이지만, 인물의 생각과 행동에 강력한 설득력을 부여하는 사실주의적 서술이 엠마를 특별하게 만든다. 엠마는 누가 봐도 한심하고 못됐으며 도덕적이지 못하고 음란한 여인이다. 그러나 그녀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결혼 생활에서, 불륜으로 빠져드는 과정에서 어떤 생각과 말과 행동들을 통해 거기에 도달했는지 확인하며 독자는 마치 그녀 자신이 되어본 듯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역사상 최악의 악녀로 여겨지는 메데이아에 경악하면서도 그녀를 도통 이해하기 힘들어 비난하기만 했던 것과는 다르다. 그렇게 먼 과거로 갈 필요도 없이, 『오만과 편견』의 베넷 부인이나 리디아는 분노를 유발할 뿐 그 행동들을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고, 같은 프랑스 작가로서 사실주의의 시조라 평가받는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에서도 영감의 두 딸 역시 이해 못 할 악녀들일뿐이다. 그러나 엠마 보바리는 두 세기가 지난 지금도 주변에 존재할 것만 같은 인물이다. 우리는 실제로 주변에서, 혹은 뉴스나 가십거리를 통해 비슷한 전철을 밟으며 인생을 망치는 사례를 본다. 그렇게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적인 인간의 심리와 행동이 드러날 수 있었던 건 인간에 대한 실존적인 통찰과 그것을 사실 그대로 그려 넣은 덕분이다.
본 작품의 사실주의는 주인공에만 그치지 않는다. 주변 인물들의 다채로운 성격과 관심사들, 크고 작게 일어나는 사건들, 불륜의 적나라한 모습과 전개, 그 과정에서 변화해 가는 심리, 그리고 엠마의 최후까지도 지극히 사실적이다. 불륜이라는 향락에 빠져 정상적인 생각과 판단을 하지 못하고 온갖 물적, 심적 증거를 흘리거나 뒷일을 생각지 못하고 막대한 빚을 내는 등 엠마는 점점 더 타락해 간다. 그러다 모든 업보가 쌓여 폭발하기 직전, 수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충동적으로 비소를 삼켜 자살하기에 이른다.
엠마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달리 남편 샤를은 정반대의 인생을 산다. 마치 샤를의 따분함이 엠마의 타락에 책임이 있는 듯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샤를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끝까지 엠마를 사랑했고 그녀를 한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 작품 중 유일하게 사실적이지 못한 부분을 굳이 꼽자면 샤를이 놀라울 정도로 둔하다는 점이다. 애초에 시대적 윤리관이나 샤를이라는 인간의 특성상 불륜 자체를 상상치도 못했을 수 있고, 의사 일에 워낙 바쁘고 지쳐서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엠마의 행동들에 수상한 점이 너무도 많았다. 물론 그렇게 상상도 못 했기에 샤를은 엠마 사후 그녀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된 뒤 엄청난 충격에 빠져 죽음에까지 이르고 만다. 그들의 유일한 딸은 고아가 된 뒤 친척 손에 맡겨졌다가 열악한 환경의 방직공장에 보내진다. 이 세 가족만 봐도 최악의 비극적 결말인데, 주변 인물까지 보면 더하다. 엠마를 파멸로 몰아넣은 불륜 상대들과 주변 인물들은 보바리 부부가 모두 죽은 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잘 살아간다. 특히 시종일관 넘치는 속물근성을 보여 주던 약제사 오메는 그토록 열심이던 지독한 처세에 성공해 훈장을 받는데, 그것이 이 작품의 가장 마지막 서술이다. 작품 내내 몰아친 보바리 부부의 비극적인 삶이 막을 내린 뒤, 속물적인 오메의 성공을 비추는 마지막 장면은 현실의 냉담함을 그대로 보여 준다.
이 오메라는 캐릭터는 엠마 보바리만큼이나 독특하고 매력적이다. 역시 현실에서 얼마든지 존재할법한, 윗사람에게 아부하고 주변 모두에게 사람 좋은 척 하지만 뒤에서는 이기적이고 악독한 모습으로 자신의 성공을 꾀하는 인물이다. 성공을 위해 샤를을 꼬드겨 입증되지 않은 수술법으로 불쌍한 일꾼의 다리를 잘라내게 만들기도 하고, 보바리 부인의 죽음 과정에서 맞닥뜨린 상황을 자신의 출세 기회로 이용하기도 한다. 심지어 당시 사회에서는 성역이나 마찬가지였던 종교조차도 그의 실속주의 앞에서 쓸데없는 허례허식이 되고 만다. 오메는 당시 프랑스혁명과 왕정복고를 거치며 프랑스 사회 주요 지배층으로 성장한 부르주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플로베르는 오메를 통해 그들의 위선적이고 속물적인 모습을 풍자하고 비판했다. 특히 오메의 행보는 엠마와 대비되어 더욱 뇌리에 남는다. 오메가 돈과 명예라는 현실적인 이익을 좇는 속물이었다면, 엠마는 멋들어진 왕자님, 귀족의 화려함, 격정적인 사랑 등 당시 연애소설 속 과장되게 그려진 허영된 삶을 원하는 속물이었다. 이 두 사람의 행보는 부르주아와 귀족, 사실주의와 낭만주의를 대변하며, 오메가 성공하고 엠마가 몰락하는 것은 귀족 사회와 낭만주의의 종말을 고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오메가 성공했다고 해서 부르주아와 사실주의를 긍정적으로 비추는 것은 아니다. 그를 지독하고 혐오스럽게 그려낸 것은 그 이면에 있는 추악함도 함께 드러내기 위함이다. 즉, 시대적 교체일 뿐이지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엠마의 모습이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녀가 가졌던 이상과 현실에 대한 괴리, 이상을 향한 갈망, 그것을 충족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좌절을 겪는다. 플로베르는 낭만주의를 부정한다기보다는 그것이 주는 환상과 이상이 현실과 괴리가 있음을 사실적으로 보여주었을 뿐이다.
플로베르는 이 작품을 통해 사실주의 대표이자 선도적인 작가로 거듭났다. 사실주의의 성격과 『보바리 부인』의 냉혹한 줄거리만 보면 그의 문체 역시 차갑고 건조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반대로, 그는 엠마의 시선을 통해 그녀가 세상을 바라보고 그녀가 갈망하던 낭만주의적 상념과 그녀의 격정적인 사랑(불륜)을 매우 감각적으로 써냈다. 주변 환경에 대한 시각, 촉각, 후각적 요소들을 사실적이면서도 감각적으로 활용해 인물의 상황과 감정, 행동을 효과적으로 묘사한다. 가장 탁월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엠마와 내연남들의 성애 장면이다. 그는 성애 장면에서 행위 자체를 직접적으로 서술하지 않았고 선정적인 표현도 쓰지 않았다. 로돌프와의 첫 밀애에서는 ‘몸을 내맡겼다’라는 표현만 있을 뿐, 그 뒤로 이어진 자연환경과 엠마의 심리 변화에 대한 묘사를 통해 정사가 이루어졌음을 짐작케 한다. 특히 여러 차례 묘사되는 정사 직후 엠마의 흐트러져 있으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은 그녀 내면의 문란함 및 추악함과 대비되며 설명하기 힘든 자극을 주는데, 이런 표현들에서 역시 작가의 뛰어난 감각이 드러난다. 이와 관련해 가장 유명한 건 레옹과의 마차 내 정사 장면이다. 마차가 끊임없이 달리는 모습과 엠마가 마차에서 내려 황급히 사라지는 모습 정도만 그려질 뿐이지만, 레옹의 흥분된 외침, 땀에 젖은 말의 역동적인 움직임, 계속해서 덜컹거리는 마차 등 상황 묘사를 통해 그 안에서 격정적인 정사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역시 구체적인 성애 묘사가 나오지도 않았지만, 이 장면은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논란이 되었고 기소까지 당했다.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고, 이 기소는 오히려 플로베르와 『보바리 부인』의 명성을 높여 주는 데 기여했다.
엠마를 보고 있자면 돈키호테가 떠오른다. 엠마는 삼류 연애소설에 빠져서, 돈키호테는 삼류 기사 소설에 빠져서 이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문제를 일으킨다. 다만 그 결과 엠마는 문란하고 어리석어 인생을 망치는 캐릭터로, 돈키호테는 무모하지만 꿈과 이상을 좇아 고군분투하는 캐릭터로 남았다. 둘은 각각 ‘보바리즘’과 ‘돈키호테형 인간’이라는 개념을 낳았다. 비슷한 구도를 가지고 있지만 둘의 차이는 크다. ‘연애’와 ‘기사도’라는 집착의 대상부터 내포하고 있는 가치가 다르다. 여성인 엠마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나서기 어려웠고, 그 탓에 그녀의 열정은 내면에서만 맴돌며 그녀를 타락으로 이끌었다. 반면 돈키호테는 제정신은 아니었지만 무모한 모험을 통해 이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엠마에게는 신념이 없었다. 자기가 원하는 것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환상만 있을 뿐, 자신의 행동의 기준이 되고 쓰러지지 않게 지탱해 줄 신념이 없었다. 그러니 내연남들과 채무자에게 이리저리 휘둘리고 이용당하다가 신세를 망치고 만다. 돈키호테는 신념 그 자체인 인물이니 흔들릴 여지가 없었다. 다만 그것이 정신이상 또는 치매 증상이라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보바리 부인』은 사실주의를, 『돈키호테』는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품이라는 점도 두 작품의 재미있는 관계다.
‘보바리즘’은 현세에도 여전하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는 듯도 하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듯한 각종 양산형 미디어 작품들과 인플루언서들의 SNS는 대중의 환상을 부추긴다. 거기에 빠져 있는 사람은 현실에서 이상을 찾지 못하고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며 우울해하고 좌절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환상을 충족시켜 줄 다른 환상을 찾아 매진하고, 악순환이 반복된다. 욕망과 상상이 결합해 발현하는 보바리즘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플로베르도 이 작품을 두고 '나 자신이 보바리 부인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다만 거기에 빠져 무너지지 않도록 이성의 끈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이 작품은 욕망과 상상이 만들어내는 환상의 이면을 보여줌으로써 이성의 끈을 더 견고하게 만들어 준다. 요즘 세상에서 더욱 필요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