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신사'의 의미
찰스 디킨스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영국은 물론 영문학을 대표하는 거장이다. 『위대한 유산』은 디킨스가 사망하기 10년 전에 집필한 작품으로, 그의 필력과 신념이 집약된 걸작이다.
『위대한 유산』은 출세와 신분 상승을 꿈꾸는 청년 핍의 성장기다. 당시 산업혁명은 심각한 빈부 격차뿐만 아니라 자본을 이용한 계층 간 이동의 기회도 가져왔고, 그 영향으로 출세를 꿈꾸는 청년에 대한 여러 작품들이 탄생했다. 대표적으로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 스탕달의 『적과 흑』 등이 있다. 공교롭게도 이 세 작품은 모두 프랑스 작품이며, 주인공들이 귀부인이나 귀족 영애와의 사랑을 통해 출세를 꿈꾼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와 비교했을 때, 영국 작품인 『위대한 유산』의 주인공 핍은 제목에서도 드러나는 바와 같이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으면서 자본으로 신분 상승에 도전한다. 이러한 차이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프랑스 귀족 사회는 폐쇄적이어서 인간관계에 대한 의존성이 강했다. 그래서 사교계에 진출하거나 귀족 집안과의 혼인 관계를 통해 출세를 노리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에 비해 영국은 산업혁명과 자본주의가 태동한 국가인 만큼 자본을 통한 계층 이동이 비교적 수월한 편이었다. 그래서 에스텔라에 대한 핍의 사랑은 목표이지 수단은 아니다. 두 번째 이유는 핍이 다른 작품의 주인공들에 비해 지극히 불리한 상황에 있다는 점이다. 『고리오 영감』의 외젠은 가문이 몰락했으나 어쨌든 귀족 출신이고, 『감정 교육』의 프레데릭은 중산층 부르주아였으며, 『적과 흑』 쥘리앵은 평민이지만 라틴어와 신학 등 고급 교육을 받았다. 모두 태생적으로나 개인의 능력으로 출세의 가능성이 있다. 반면 핍은 평민도 아닌 하층 노동자 계급이다. 부모도 없어 대장장이 일을 하는 매형과 누나 집에 얹혀 산다. 교육은커녕 어디 하나 기댈 구석도 없다. 핍이 출세할 수 있는 길은 돈으로 신사 흉내를 내며 기회를 잡는 것뿐이다. 그런 면에서 핍에게 이 유산이라는 것은 그 어떤 작품의 주인공들의 그것보다 중요한 셈이다. 그래서 작품의 제목도, 내용의 전개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이 ‘유산’이다.
당시 문학은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모두 귀족이었기에 주인공 역시 대부분 귀족이었고, 많이 봐주어서 평민 정도였지 하층민으로 등장하는 일은 드물었다. 하층민이 주인공인 작품을 귀족들이 읽을 리도 만무하였고 애초에 작가가 하층민의 삶을 알지도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디킨스가 하층민 핍을 주인공으로 세울 수 있었던 건 그가 하층민이나 다름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다. 디킨스는 하급 군무원의 아들로 태어나 평민 계급이었으나 그의 아버지가 재정적으로 몰락하고 빚 때문에 감옥까지 가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고, 디킨스는 교육도 받지 못하고 공장에서 과중한 노동을 견디며 하층 노동계급의 삶을 살았다. 주경야독의 노력 끝에 빈곤에서 벗어났으나 어린 시절의 고된 경험은 그에게 폭넓은 경험과 통찰을 제공했고 이는 그의 작품들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다.
디킨스는 본 작품에서 하층민 고아 소년 ‘핍’의 성장기를 통해 ‘진정한 신사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한다. 신사, 즉 젠틀맨은 본디 신분제 사회에서 젠트리라는 상류 계층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들은 사회적이나 경제적으로 상위 계층에 속했고 고급문화를 향유했다. 그러니 핍이 우연히 막대한 유산을 받고 신사 교육을 받아 신분 상승을 꿈꾸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과정에서 핍이 속물적이고 오만한 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하더라도 기본적인 ‘신사’라는 의미에 반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디킨스는 ‘신사’의 의미에 계급뿐만이 아닌 인간의 성품과 태도의 요소를 부여했다. 그는 ‘상류 계층’이 사회의 부를 거머쥐고 일반인들을 지배하는 존재가 아닌, 일반인들에게 모범이 되고 그들을 이끌어줄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작품 중 그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은 역설적이게도 핍의 매형이자 하층민 노동자 대장장이인 ‘조 가저리’다.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노동자로, 정직하고 근면하며 이해심, 자립심, 자기희생 등을 고루 갖춘 뛰어난 성품을 지니고 있다. 그는 세습된 부를 누리는 귀족들과 달리 정직한 노동을 통해 소소하지만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그렇게 모은 재산마저도 출가 후 자신을 무시한 핍이 빚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그를 구하기 위해 사용한다. 조는 디킨스가 강조하는 기독교적 덕목들을 갖춘 진정한 ‘신사’인 셈이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계층 간 이동이 비교적 자유로워지면서 신분의 가치는 모호해졌다. 디킨스는 누구나 돈만 있으면 상류층이 될 수 있는 세상에서 상류층에게 요구되는 것은 ‘지배’가 아닌 ‘모범’, 선도’의 역할임을 강조한 것이다.
대장장이 조가 진정한 신사로 여겨지는 것과 달리, 작품 속 상류층은 속물적이고 비도덕적, 비인간적인 인물들에 의해 풍자된다. 대표적으로 혈통만 빼면 내세울 것 없이 무능력한 포켓 부부, 오만하고 폭력적인 드러믈, 성공과 돈을 위해 철저히 계산적이고 비인간적인 변호사 재거스 등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인물은 역시 미스 해비셤이다. 어린 시절 결혼식날 약혼자에게 버림받아 내면이 뒤틀려 버린 귀족 노처녀인 헤비셤은 막대한 재산을 들여 그녀의 양녀 에스텔라를 아름답지만 쌀쌀맞고 괴팍한 소녀로 키우는데, 그 모든 것은 자신을 버린 남성에 복수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얄궂게도 핍이 그 희생자가 된다. 에스텔라를 사랑하게 된 핍은 그녀와 결혼하는 꿈을 키우며 여러모로 부단히 노력하지만, 헤비셤은 그녀를 못난 드러믈과 결혼시킴으로써 핍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힌다.
핍은 이런 상류층의 면면을 접하면서 본인 역시 조를 비롯한 하층민 시절 친지들을 무시하거나, 향락과 소비에 찌든 삶을 사는 등 그들에게 물들어 간다. 그러다 자신에게 유산을 남긴 사람이 귀족 헤비셤이 아닌 범죄자 매그위치임을 알게 되고, 에스텔라의 결혼, 헤비셤의 죽음, 매그위치와의 조우, 그의 도주를 돕지만 결국 실패하여 그가 받기로 했던 모든 유산이 물거품이 되는 일까지 겪으면서 핍은 내적으로 큰 변화를 맞이한다.
핍의 성장 과정에는 물론 긍정적인 인물들도 있다. 성자와도 같은 매형 조는 물론이고, 마찬가지로 고향에서 만난 하녀 비디는 겸손하고 도덕적이며 선하고 지혜로운 여성으로, 핍이 스스로를 돌아보도록 하는 존재다. 런던에서도 현실적이고 성실한 친구 허버트를 통해 우정과 신뢰, 협력의 가치를 배워 간다. 변호사 재거스의 사무실에서 서기로 일하는 웨믹도 있다. 그는 일터에서 냉정하고 기계 같은 태도를 보이지만 집에 돌아가면 다정하고 유머러스한 모습으로 인생을 즐기는 인물이다. 그는 속물적이고 타락해 가는 런던 사회에서 지혜롭고 현명하게 살아가는 방식을 핍에게 보여 준다. 핍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인물은 역시 매그위치다. 어렸을 때 만나 오래도록 핍에게 공포의 존재였던 범죄자 매그위치가 사실 그에게 유산을 남긴 인물임을 알았을 때 핍은 큰 충격을 받는다. 게다가 그는 범죄자일지언정 성실한 노동으로 재산을 모았으며 그것을 하층민인 핍을 신사로 만들어 주기 위해 사용했다. 핍은 그런 매그위치에게 연민과 책임감을 느끼고 그를 끝까지 보호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후 매그위치의 과거가 밝혀지고 그가 끝내 사망하기까지, 모든 과정에서 핍은 앞서 언급한, 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들의 도움을 받으며 점차 세상을 이해하고 본질적인 가치를 찾아 나아간다.
작품의 원제목 『Great Expectations』을 직역하면 ‘거대한 희망(기대)’ 쯤이 된다. ‘Great’에는 ‘거대한’과 ‘위대한’ 등의 의미가 있으며, ‘Expectations’에는 당시 문화와 관습에 비추어 ‘유산 상속에 대한 기대’, 혹은 ‘예정된 상속’ 등의 뉘앙스가 있다. 이러한 단어들을 사용함으로써 제목은 중의적인 의미를 갖다. 핍은 어느 날 상상도 못 했던 ‘막대한 유산’의 상속 예정자가 된다. 하층민이었던 핍은 이 유산을 통해 신사가 되어 상류층에 진입하겠다는 ‘거대한 기대’를 품고 런던으로 향한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들을 겪은 뒤 유산 상속은 없던 일이 되어 버리지만, 핍은 오히려 진정한 신사의 의미와 삶의 중요한 가치를 깨달으며 성장한다. 결국 매그위치가 남기려 했던 유산은 실체적으로는 물거품이 되지만 핍을 진정한 신사로 거듭나게 하는 경험과 교훈을 제공한 ‘위대한 유산’이 된 셈이다.
당시 개인의 성장을 다룬 소설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위대한 유산』에도 사실주의와 낭만주의가 공존한다. 갑작스러운 유산 상속이나 신분 상승과 같은 주인공의 서사는 낭만주의적이면서도 그가 들여다본 상류층의 모습과 냉담한 현실은 사실주의적이다. 결국 사랑에 실패하고 유산을 모두 잃는 비극적인 결말임에도 진정한 신사의 의미를 깨달으며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하는 핍의 모습과 훗날 에스텔라를 다시 만나면서 둘의 관계가 회복될 것을 암시하는 장면들에서는 다시 낭만주의가 드리워진다. 이러한 면에서 『위대한 유산』은 앞서 언급했던 다른 작품들에 비해 더 희망적이고 교훈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디킨스 자신부터가 밑바닥에 떨어졌다가 노력을 통해 큰 성공을 이룬 작가인만큼 그러한 경험의 영향이 클 것이고, 그에 따른 디킨스의 대중에 대한 태도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영국 사회의 밑바닥부터 상류층까지의 면면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 폐해와 부조리를 고발하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허무로 끝내지 않고 인간성의 회복과 교화를 믿었으며, 그로부터 사회의 긍정적 변화를 이끌어 내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