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Prologue
들어가며
이 글은 지난 10여 년의 시간을 돌아보고 글로 써 내려감으로써 나 자신에게 위로를 건네고 싶은 마음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퇴사를 꽤 긴 시간 동안 천천히 고민했다. 아니 어쩌면 내가 처해진 상황 때문에 언젠가는 퇴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완전 퇴사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결정이었고, 그로 인해 너무 많은 일들이 내게 일어났다.
평범하게 대학을 나와 직장인이 되었고, 12년을 일했다. 사회 초년생 시절 커리어우먼인 선배를 보며 동경했고, 나도 선배의 연차가 되면 멋진 직장인이 되어있으리라 생각하며 일했다. 동시에 워킹맘은 내 인생에 당연히 들어있던 계획이었다. 그런 내가 은퇴에 가까운 퇴사를 결정했다. 그 결정으로 내 인생이 뒤틀리기 시작했고, 인생에 이런 밑바닥이 있었나 싶을 정도의 절망감을 느껴야 했다.
얼마 전 나는 남편과 혼인관계의 해소, 즉 이혼을 통해 법적인 싱글이 되었다. 회사를 그만둘 때만 하더라도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여전히 시퍼런 멍을 매일 어루만지고 있지만 글은 쓸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괜찮아지고 있고, 글을 통해서나마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나의 이야기를 풀어내며 스스로 치유하고 싶어졌다. 또한 나와 비슷한 상황의 누군가에게 용기와 응원도 보내고 싶어 진다.
방황하던 20대는 여느 취준생과 비슷했다.
20대 시절에는 뭔가 크게 꼭 하고 싶은 건 없었던 것 같다. 남들과 같이 평범하게 대학을 다녔고, 그 당시 너도 나도 한 번씩은 도전했던 공무원 고시에 2년의 시간을 고스란히 바쳤다. 부모님도 그러길 바라셨고, 종종 들려오는 선배들의 합격 소식에 자연스레 수험생이 되었다. 3학년 여름방학부터 학원가의 명강사 강의들을 찾아다니며 들었고, 짧은 휴학 그리고 졸업 이후에도 수험서에 파묻혀 살았다. 2년의 시간을 고시촌과 도서관에서 온전히 보냈지만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지금과 달리 공무원의 인기가 말도 못 하게 치솟았던 시기이기도 했지만 열심히 하면 될 거라는 근자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결과 발표가 있던 날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없음에도 실망감이 아니라 홀가분함을 느꼈다. 나는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가 이 '불합격'이 세 글자라면? 받아들이자!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 부모님께 더 이상 공부하지 않겠다고 당당히(?) 말할 정도는 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하찮은 자기 합리화, 핑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만.
더 깊은 속 마음은 아무한테도 말한 적은 없지만 단 한두 문제를 더 맞히기 위해 일 년, 아니 그 이상이 될지도 모르는 시간 동안 그 짓을 또 하기 싫었다. 한 편으로는 (상대적으로) 풍족하지 않았던 수험생활이 나를 자격지심에 쩌들게 했고, 결과가 불합격이라니 내 자존감이 바닥을 뚫고 지하로 파고들었기에 다시는 그 수험서를 펼치기도 싫었다.
불합격을 확인한 후 내가 선택한 진로는 사기업에 취직하는 일이었다. 사기업에 취직하려고 하니 수험생활을 한답시고 아무런 스펙을 쌓지 못해 백지상태였다. 친구들은 어학연수, 인턴, 공모전으로 빵빵한 스펙을 쌓을 동안 나는 수험생활로 졸업 후 2년이란 시간까지 써버린 터였다. 그래도 맨땅에 헤딩하는 수 밖에 없으니 먼저 취직한 친구에게 조언을 받아 OA자격증을 취득했고, 토익을 공부를 했다. 수험생활로 다져진 공부습관으로 OA자격증 같은 건 너무 쉬웠고, 수험영어에 비하면 토익은 재미있을 지경이었다. 속성으로 만들 수 있는 스펙을 만들면서 이력서도 쓰고 자소서의 첨삭도 받았다. 나는 그 해 하반기 취업시장에 뛰어들었고, 인서울의 대학 졸업장과 나쁘지 않은 학점으로 생각보다 빨리 취직할 수 있었다.
대졸초임으로 얼마를 받든, 돈을 번다는 게 좋았다.
수험생활은 오전 8시부터 저녁 11시까지 주 7일을 해도 합격의 보상이 없었는데, 회사는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6시에 퇴근하며 주 5일만 해도 통장에 200만 원이 넘는 거금(!)이 입금되었다. 그것도 매달.
자식들을 위해 사업에 두 분의 젊음을 갈아 넣으신 부모님께 더 이상 짐이 되지 않고 경제적인 독립을 할 수 있는 것이 가장 기뻤으며, 나와는 다르게 목표가 확고했던 형제의 수험생활에 매달 얼마간의 용돈도 쥐어줄 수 있었다. 많지는 않았지만 한 달에 84만 원씩 12개월간 1천만 원을 모을 수 있는 적금도 시작할 수 있는 것도 뿌듯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일이 내 적성에 잘 맞았다. 내 첫 사수는 뭘 해도 잘한다 잘한다 해주는 사람으로 내 자존감을 높여주며 동기부여를 해주었다, 감사하게도 인성까지 괜찮은 선배였고, 팀의 막내로 동성 선배들에게도 이상하리만치 예쁨을 받았다. 돌이켜보면 그런 동료들을 만났던 건 내겐 행운이었고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후배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기준이 되어주었다. 내가 리더복은 없어도 동료복이 있다는 걸 새삼 생각하게 된다.
나의 첫 목표는 승진이었고, 두 번째 목표는 승진 후 대리 월급을 3개월 받은 후 이직을 하는 것이었다. 어렵지 않게 승진의 목표를 이뤘고, 특히 두 번째 목표인 이직은 내 직장생활에서 가장 잘 한 선택이었다.
두 번째 직장에서 나는 내가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수습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느꼈다. 그만큼 배울게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