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내 Sep 09. 2024

12년 차 직장인, (완전)퇴사를 선택하다.

04. 날개로 날아보자  +  남편의 주재원 발령 

살면서 처음으로 '무직'이 되었다. 

학생, 취준생, 회사원이 아니라 진짜 아무런 의무와 책임이 없는 백수가 되었다. 쌩퇴사 후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멘탈과 체력을 회복시키려 그냥 푹 쉬었다. 회사를 다닐 땐 시간이 없어 할 수 없던 요가를 시작했고, 날이 좋은 날에는 자전거를 타고 집 주변 공원과 근교를 신나게 달렸다. 그렇게 매일 낮에 동네를 쏘다니다 한 분양사무소의 모델하우스를 구경하게 되었고, 아파트로 가득한 우리 동네에 대단지 신축아파트가 생긴다는 것을 알았다. 간 김에 갑 티슈 등 홍보물품을 받으며 반신반의로 분양상담을 받았더니 자녀가 없으면 청약에 당첨되기는 어렵다고 했다. 그냥 경험 삼아 나와 남편의 청약통장으로 2개의 청약을 신청했는데, 결과는 당첨이었다.


내 통장으로 당첨된 청약이라 나에게 당첨 및 향후 절차에 대한 안내 문자가 왔다. 그날이 발표날 인 줄도 모르고 있었던 탓에 스팸인 줄 알고 지워버리려고 했던 게 기억난다. 분양가의 10%에 해당하는 계약금이 필요했는데, 마침 통장에 퇴직금이 들어와 있었다. 모든 게 착착 준비된 듯 이어지는 것 같았고  지옥 같은 회사를 탈출하니 내게 좋은 일만 생기는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겨우 3개월밖에 안 쉬었는데(...) 중도금과 잔금을 열심히 벌어야 하는 동기가 생겼으니 다시 구직을 해야 하는 게 내심 아쉬웠다. 어쨌거나 남편이 출근할 때 같이 나가 도서관으로 향했고 몇 번의 이력서와 자소서를 작성한 후 어렵지 않게 괜찮은 회사에 다시 입사할 수 있었다. 


똥차가 가고 벤츠가 온다고 했던가? 

새롭게 들어간 회사에서는 나에 대한 기대가 명확했다. 온전히 한 명의 몫이 정해져 있었고, 전임자의 역할을 잘 인수인계받아서 , 그보다 조금만 더 잘하길 바랐나 보다. 이전 회사와 비교했을 때 낮은 기대치와 근무강도, 극강의 워라밸, 기대 이상의 연봉은 내가 그동안 고생했던 걸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조금만 고민해서 기획안을 쓰고 실행하면 본부장님과 팀장님의 칭찬을 받았고, 일 년이 지난 후 평가를 통해 조직에서의 인정도 처음 느껴 볼 수 있었다. 이런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진짜 '벤츠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가권자들의 인정을 받는다는 게 이런 것이라는 걸 느끼며 꽤 만족스럽게 근무했다. 안정적으로 행복한 가정과 직장 생활을 하던 시기에, 갑자기 변화가 찾아왔다. 남편이 주재원 발령을 받게 된 것이다. 


출장자에서 주재원으로 

남편은 연애시절에도 해외 출장이 종종 있었다. 출장의 기간은 짧게 2주에서 길게는 두 달까지도 이어졌다. 그 회사의 해외 법인이 커지는 시기이기도 했고 남편의 직무 특성상 원격으로 근무하기가 어려웠기에 장기 출장이 점점 잦아졌다. 어느 날부터인가 장기출장으로는 업무의 공백이 생겨 회사에서 주재원 발령을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종종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식 주재원 발령을 받았다. 남편과 나는 고민을 했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같이 이주를 할 것인지 아니면 남편이 주재원으로 자리를 잡을 때까지 잠시 롱디를 할 것인지를. 우리는 그때 최상의 결정이 아닌 최선의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의 결정과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COVID-19 팬데믹은 나비효과를 불러일으켰고,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이 결정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나는 다른 인생을, 아니 내가 꿈꾸던 인생을 살고 있을까? 인생에 IF는 아무 의미가 없다지만 한 순간을 떠올려야 한다면 이때의 결정일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