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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내 Sep 11. 2024

12년 차 직장인, (완전)퇴사를 선택하다.

05. '젊을 때' 맞이한 이별과 전염병

인생이 내 계획과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청약에 당첨되고, 남편이 주재원 발령을 받았을 즈음엔 우리는 각자의 회사에서 중간관리자로 자리를 잘 잡아가던 시기였다. 경제적으로도 남편은 승진을 통해, 나는 이직을 통해 연봉을 올리며 결혼 초 보다 풍족해지고 있었다. 남편은 신혼을 즐기고 싶다 했고, 나도 이에 동의했으며, 우리 스스로가 이루는 경제적 풍족함도 싫지 않았다. 남편과 함께 해외로 이주를 결정하여 내가 일을 그만두면 수입이 딱 반으로 줄어버리는 통에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나 역시 힘들게 이어온 커리어를 포기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의 이런 내적인 고민과 별개로 심사숙고할 겨를도 없이 남편의 해외 근무가 시작되어 반강제로 롱디를 하게 되었다. 


주재원 발령이 있던 해에 우리는 2~3개월을 텀으로 한국과 발령지, 제3국을 왔다 갔다 하며 총 4번을 만났다. 남편의 빈자리가 컸지만 평일에는 나도 일을 하느라 바빴고, 주말에는 본가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며 외로움을 잊으려 노력했다. 그래도 결혼기념일은 해외 휴양지에서 함께 보냈던걸 스스로 위로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때부터 나는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를 남편과 보내본 적이 없다. 나도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 


이듬해 초에 남편의 특별승진으로 연봉과 주재수당이 올랐고, 나 역시 연봉이 20% 이상 올랐다. 이렇게 돈을 모으면 분양받은 집의 중도금의 대출금을 금방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아이는 조금 천천히 갖고, 젊을 때 조금 고생해서 바짝 벌자'던 해외에서 고생하는 남편의 말을 믿었다. 


하늘길이 막혔다. 

뉴스에서 중국에 원인불명의 전염병이 돌고 있다고 했다. 사스와 메르스라는 전염병에 대한 기억이 있었기에 이것도 비슷하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해 여름휴가로 부부의 위시리스트 중 하나인 스페인여행을 꿈꾸며 티켓팅을 알아보고, 여행 스케줄을 그렸었다. '코로나'라는 전염병의 이름이 익숙해지기도 전에 전 세계에 팬데믹 공포가 찾아왔고, 마스크를 쓰고 일상생활을 해야 하는 예상치 못한 그림들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스페인 여행은 물거품이 돼버렸고, 여행의 취소 따윈 문제도 아니었다. 벌써 남편을 본 지 5개월이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해외에 나갔다가 입국을 하면 2주간 자가격리를 해야 한다고 하니, 평범한 직장인으로서 나의 해외 출국 or 남편의 입국이 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2020년 4월의 일이었다. 


여름정도가 되면 끝날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COVID-19'의 전염 속도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회사에서도 한 명의 확진자가 발생해 전 직원이 2주간 재택근무를 하는 긴급상황도 생겼고, 사내 확진자의 출근으로 같은 층에 근무하던 직원들이 즉시 조퇴해 근처 병원에 가서 코로나진단검사를 받기도 했다. 이때는 보건소의 코로나 검사 및 드라이브스루 시스템이 갖춰지기도 전이었던 것 같다. 모두가 처음 겪는 상황에 당황했고 이는 남편이 있던 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은 체류 국가의 강력한 통제 정책에 의한 이동 제한으로 숙소에서의 출퇴근이 어려워졌고, 회사 한편에 마련된 간이침대와 샤워실, 직원식당을 이용해 숙식을 해결하며 한 달 이상을 코로나와 싸우고 있었다. 그런 남편에게 언제 올 수 있느냐, 우리 언제 볼 수 있느냐 징징거릴 수 없었다. 그야말로 나도, 그도 처음 겪어보는 '천재지변'에 가까운 불가항력적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결혼식 때 들었던 부케를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이 색바램으로 점점 흑백사진이 되어가고 있던 시기였다. 나의 결혼 생활도 그 사진처럼 색이 바래가고 있었지만, 난 그저 우리 부부가 잠시 의도치 않게 떨어지게 되었을 뿐이고 이는 모든 사람들이 다 마찬가지라고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렇게 결혼기념일,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를 나는 한국에서, 남편은 해외에서 따로 보내게 되었다.


더 최악인 것은 모두가 아는 것처럼 '코로나'는 그 해가 시작이었다는 점이다. 남편이 이야기했던 '젊을 때'가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고, 그 보상으로 통장 잔고가 늘어나고 있었다. 내가 바라던 인생은, 계획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나는 뭘 기대하며 그 시간을 버텼던 것인지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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