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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잉오렌지 Apr 05. 2024

나는 이제 정상이 되었을까?

겉으로라도?

서로 다른 빛깔의 꽃들로 가득한 나만의 화원.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가지 계통의 빛깔로 정원을 조화롭게 가꾸어나갈 때,


나는 과감하게 푸른색과 주황색 꽃을 한 화분에 꽂아넣는다.






또다시 진로를 바꾸기로 정했다. 


어떤 특별한 사건이 나를 정신 차리게 하지는 않았다. 내가 이전에 홧김에 자퇴라는 선택을 했듯이, 이번에도 비슷했다. 아무런 특별한 이유도 없었다. 나는 그렇게 합리적인 근거에 따라 움직이는 합리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단 그만두기로 했다.



왜냐고?   그냥. 


너무 힘들어서?   아니.


죽고 싶어서? 우울해서? 떠나지 않으면 미친듯이 큰일날 것 같아서?   


아니. 나는 여전히 평온하다. 평온하면 안되는 때에, 오히려 내 가슴은 잔잔하게 흐느적거리곤 한다. 

능숙하게 회피한다. 나의 감정을. 모른척한다.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전부 잊힐 감정이니까.


가끔 또다시 '알 수 없는' 이유로 머리가 아프고 새치가 나고 잠을 못자곤 하지만.. 

그건 뭐.. 누구나 겪는 고통이니까.

'나'의 고통이 아니니까.



다만, 내가 지금까지 무시하고 일부러 보지 않았던 것을 지금은 보고 있을 뿐이다. 배움으로 인해 내 시야가 넓어졌고, 나는 내 머리를 사로잡는 비합리적인 개념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었다. 그게 뭐냐고?


쉽게 말하면... 콩깍지.



혹은 보상 심리?



그것도 아니면 반항심.




내가 기적 같이 재수에 성공하는 그런 거대한 도전을 해냈으니, 이제는 조금 안주해도 되지 않냐며. 이곳에 오게 된 건 나의 운명이니 당연히 여기에 뼈를 묻어야겠다... 


그런 얕은 생각들. 너무나도 얕은 생각들. 내 안에까지 흘러들어오지 않지만 표면을 덮어씌워버리는 자극적이지만 얕은 생각들.


아, 운명. 나는 운명이라는 단어를 정말 싫어한다.



운명이라는 달콤한 우물에 빠져 나 자신이 꿀의 파도에 떠밀려가는 줄도 모르고 그저 취해있는 나날들을 보냈다. 



나는 마냥 축복받은 인간이라며 자아도취에 빠지고 다녔다. 그 나날들이 즐거웠을 뿐이지, 타의에 휩쓸리는 것은 똑같았다. 나는 내 삶을 살고 있지 않았다. 나는 또 소꿉놀이만 계속 해대고 있었다. 철없는 어린아이마냥.


나라는 사람이 변했다고, 성장했다고 이 세상에 증명하기 위한 증거가 그 어떤 것도 없었다. 어린 아이들이 엄마 아빠 역할을 정해서 소꿉놀이를 하듯이, 내 가면놀이도 그것과 똑같았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의미없는 위로와 조언들이 반복된다.



"언젠가는 잘 풀리겠지. 너는 능력 있는 사람이니까 잘 될 거야."

"취업은 일단 대학원 가고 나서 생각해. 그때 세상이 어떻게 변할 줄 알아?"

"너는 똑똑하니까 연구도 금방 잘 할 것 같은데? 안 어울리게 그런 걱정을 다하네?"

"아니 왜 그런 고민을 해? 너라면 대학원도 엄청 잘 적응할 것 같은데?"



라고 내 주변 사람들은 나를 '안심시켰다'. 마치 예전에 내 부모님이 나를 보고 "넌 해외를 밥먹듯이 드나드는 큰 사람이 될 거야"라는 운명을 내려주신 것처럼.


그래서 그 운명은 내가 가만히 말없이 기다리고 있으면 찾아와주는 걸까?

내가 그 운명에 부응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면 나중에 또 이렇게 말하겠지?



"거봐."




그래서 그 운명을 반만 실현해보기로 했다. 


내가 원하는 내 인생의 결실은 이렇다..


"나는 성장했다. 정상적인 사람이 되었고, 능력 있는 사람이 되었다."



"주변 사람들의 조언과는 반대로 실천해서."





그래서.. 어떻게 나의 '성장'을 인정받을 것인가?


나는 이제 꿈나무 신분에서 벗어나서 나의 공적인 정체성을 새롭게 만들어내야 했다. 나라는 사람이 사회에서 어떤 방식으로 정의가 내려질까? 


나 자신의 정의.. 내가 나에게 내리는 프레임도 물론 중요하지만.. 제아무리 나 혼자서 많은 성장을 이루어냈다고, 나는 이제 멀쩡한 사람이라고 세상에 떠들어봤자 



자기만족이다.




성장, 과정의 중요성은 성과 없이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성과는 당연히도, 사회에서 나에게 내리는 평가로 인해서 증명되기 마련이다. 


내가 여태껏 일구어온 가면사회에서 내게 내리는 프레임을 연결할 준비를 한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일까?


나는 어렸을 때의 꿈을 떠올렸다. 운동 선수, 화가, 작가, 뭐 그런 걸 넘어서 나의 진짜 꿈을. 




나는 이제 고쳐졌을까?



나는 정상적인 사람이 되었을까? 능력 있는 사람이 되었을까? 강한 사람이 되었을까? 민폐 끼치지 않는 사람으로 성장했을까? 나 자신을 당당하게 특정한 색깔로 소개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었을까? 


그거야말로 휩쓸리는 것 아니냐고? 내 의지가 아니라고? 남 눈치나 보는 거라고? 


그래, 오직 그것만이 나를 기쁘게 하니까.



나는 내가 인정받기 위해 배려를 하는 기만자다.




나는 내 감정보다는 내 현실을 고치기로 택했다. 


나는 또 긴장과 불안에 물들어 아파하기는 싫었다. 나는 나 자신을 변화시킨 이후로 알 수 없는 고통을 겪는 일이 매우 줄어들었다. 내가 아프고 긴장되는 건 나라는 사람이 타인에게 멋대로 정의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뿐이었다. 확실하게. 


나에게 씌워지는 프레임이 싫었다. 우울? 사회불안? 철부지? 그렇게 날 정의내리는 게 싫었다. 


나에 대한 프레임은 오로지 내가 만들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대로 가면을 쓰지 못할 때 나는 언제나 아팠다. 배든, 머리든, 가슴이든, 어디든 아팠다. 그 부위가 어디냐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그 부위에 뭐 문제가 있어서 아픈 게 아니었으니까.


나는 '누군가의 아내'나 '누군가의 엄마'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 혼자 살아가기로 정했다. 



자유롭게.





그래도..


가끔씩은 마주한다. 내가 무시하고 넘겨왔던 이상야릇한 감정들을.


감정은 표현할수록 강력해진다. 화를 내면 더 화가 난다. 웃으면 행복하다. 울면 슬프다. 감정은 해석하기 나름이다. 나는 내 얼굴에서 눈물이 나와서 내가 우울하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그래서 난 지금까지 일부러 내 감정을 회피했다. 무시했다. 그렇게 한 결과 나는 실제로 무감정한 사람이 되어갔다.


하지만 나는 무감정한 사람으로 태어나지는 않았다.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다. 


그리고.. 완전히 잊어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말없는 아이를.


나는 여전히, 말없는 아이재치있는 아이를 둘 다 사랑한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여러 색깔의 꽃을, 솎아내지 않고 함께 일구어가기로 정했다. 철저하게 보색 관계인 두 가지 색깔이 어우러질 수 있게끔, 형태 없는 파편의 정원을 가꾸어가기로 했다. 내 정원은 언제든지 그 모습을 바꿀 수 있으며, 어울리지 않는 색깔의 꽃들이 희한하게도 공존하는 곳이다. 봄이 오면 봄꽃을 메인으로 두고, 가을이 오면 가을꽃을 메인으로 두듯이, 내 정원도 그렇다.


나는 세상이 모르는 곳에서 몰래 이런 감정들을 표현하고 있다. 조금은 돌려서 표현하고 있지만, 어쨌든 모든 꽃을 키우고 있다. 완전히 잊어버리지 않게끔. 그래야 나중에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으니까.



여러모로 관리가 필요한 사람이다, 나라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날 관리하려 하지 않으니, 나 스스로라도 해야겠지 않은가.




우울이 나에게 다가와 깊은 영감이 되어주었듯이,


고독 또한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가장 거대한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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