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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잉오렌지 Apr 06. 2024

씨앗 이야기

나는 아직 완전히 개화하지 않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모순과 괴리 투성인 나라는 사람.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본 결과, 그 모순이 부자연이 아닌 자연이란 걸 알게 되었고,


더욱 더 깊게 들여다본 결과, 나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모순덩어리 인간이라는 것을 느꼈다.



다만 그 사람들과 나의 차이점은, 나는 양팔을 벌려 그 모순을 끌어안고 함께 살겠다고 다짐했다는 것이다.





나의 과거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대부분은 현재의 내 모습만을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과거의 모습을, '본성'이라고 표현한다.



초등학교 동창회에 가면, 초등학교에서 일어났던 부끄럽고 우스꽝스러운 '추억'을 이야기하며 "그땐 그랬지"라며 깔깔 웃는다. 초등학교 친구들끼리 모이면 성격 또한 초등학교 때의 성격으로 돌아가며 아이처럼 깔깔 웃는다. 누구나 초등학교 땐 철이 없다. 누구나 초등학교 시절에는 비합리적인 일로 놀림감이 된다. 


초등학교 때는 깔깔거리며 비웃을 일도, 깔깔거리며 비웃음을 당할 일도 너무나도 많다. 초등학교 때나 어른이 되어서나 성격에 큰 변화가 없는 사람을 만나면, "변한 게 없네~"라며 칭찬을 퍼붓는다.


그럼 어린 시절 때와 어른이 되어서 성격이 크게 변한 사람은?



"너 원래는 완전 소심하더니?"

"너 그때 그랬잖아. 기억 안나? 너 좀 싸가지없는 스타일이었는데."

"옛날엔 안 그러더니 많이 변했네?"



일관적인 사람. 이건 칭찬이다. 웬만하면. 사람들은 알기 쉽고 일관적인 사람을 보통 좋아한다.

일관적이지 않은 사람. 이건 욕이다. 웬만하면. 가식쟁이. 잘난척. 겉과 속이 다른 사람.


예전 시절을 알고 있는 사람은 어른이 되서 변화한 사람, 소위 말하는 '철든 사람'을 보면 예전 기억을 추억이라고 포장하며 그 가면을 벗기려고 한다. 그 속에 있던 어린아이를 들춰내서 다시 끌어내리려고 한다. 초라했던 예전 모습으로.



나는 이를 본성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씨앗이라고 표현한다.


씨앗은 어떤 생명을 정의내리는 첫 번째 명칭이자, 작은 덩치 안에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존재다. 이 가능성 중 하나를 피워내 성숙을 맞이한 존재를 나는 꽃이라고 부른다.


어떤 생명체의 가치를 평가할 때 씨앗을 보고 평가를 하는가? 꽃을 보고 평가를 하는가?




나의 씨앗을 잘 알고 있는 가족과 얘기를 하면, 내 성격 또한 어린시절로 돌아간다. 돌아가게 된다. 돌아갈 수밖에 없다.


말없는 아이. 누군가는 '본성'이라고 표현하는 나의 첫번째 가면의 모습으로.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던 시절, 무기력한 잿빛의 인간으로 다시 변해간다.


색깔이 섞여간다.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일관적인 사람. 초심. 이런 것들을 보고 우리는 친근함을 느낀다. 새롭게 알아낼 필요가 없으니까.


변한 사람. 낯설다. 거부감이 든다. 이해하려면 또다시 새롭게 학습해야 한다. 그래서 보통 변화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힘들고 어려운 경험이다. 본인이 직접 변화하는 게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나 자신, 내가 아는 것, 내 주변 사람, 내가 사는 세상이 변하는 것을 두려워 한다.




이해가 간다. 나도 지금 내 세상이 너무나도 빠른 템포로 바뀌어 가는 것이 너무 싫으니까. 힘드니까.


적응이라는 단어에 나는 애정과 증오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변화에 잘 적응하는 사람. 

그와 동시에 사회부적응자. 


나는 적응하기 위해서 내 감정을 죽였다. 녹아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눈치를 보았다. 힘들었다. 아팠다.


하지만 적응한 후에 그 고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나는 계속 적응하기를 택했다. 나는 이제 아프지 않으니까. 변화하지 않았으면 나는 아직도 내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아팠을 것이다. 타이레놀에 의존하면서 살아갔을 것이다. 일회성 진통제만 먹으면 사라지는, 나 스스로 만들어낸 그 환상통을 아직까지도 겪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런 불만도 필요성도 없는데 그냥 바뀌는 일은 없다. 아무것도. 




변화를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우리 모두는 뜨거울 때도 있고, 차가울 때도 있다. 상황에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즐겁지 않고, 언제나 슬프지도 않다. 그때그때 다르다.


언제나 외향적인 사람은 없고, 언제나 내향적인 사람도 없다. 언제나 감성적인 사람도 없고, 언제나 이성적인 사람도 없다. 당연히.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언제나 비슷비슷한 사람을, 일관성이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알기 쉬우니까. 큰 노력 없이도 이해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되고 싶어한다. 일관적인 사람이. 언제나 비슷한, 알기 쉬운 사람이 되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줏대 있다'라고 생각하며, 되고 싶은 '나'를 연기한다.



그러나 일관성은 환상이다.



나는 일부러 중간에 서서, 양쪽에 동시에 시선을 향하기로 했다. 동시에 두 관점을 바라보는 만큼 깊이는 없어진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일관성이 즉 모순이라고.



모순을 인정하는 능력. 나는 성숙의 지표를 그것으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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