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블루잉오렌지 Apr 08. 2024

이제는 스스로 꽃피울 차례

아름다운 과정을 아름다운 성과로 나타내기까지

나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고, 나를 치유할 수 있는 사람 또한 나밖에 없다.


스스로 꽃을 피울 수 있을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주어진 공부를 하느라 힘들고.. 나의 적성이 전공과 맞지 않아서 힘들고.. 주변 사람들 탓에 힘들고.. 


그런 고통들을 겪고 조금은 성숙해진 나에게, 또다른 색다른 부류의 고통이 찾아왔다.



뭘 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고통.


눈앞이, 먼 미래는 커녕 가까운 앞날도 보이지 않는 캄캄함.


텅 빈 황무지에서 나 혼자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개척해나가야 한다는 불안.


우울이 아닌 불안의 짙은 잿빛이 내 몸을 아찔하게 감싸기 시작한다.




우울과 불안은... 그 결이 상당히 비슷하다. 보통은 세트다. 같이 온다. 내가 그랬듯이.


사실 내가 괴롭다고 체감한 정도는 우울보단 불안이 좀 더 심했다. 우울은 내겐 별 티가 나지 않았으니까. 

나의 우울은 길고, 옅고, 흐렸다. 은은한 잿빛으로 날 감싸고 서서히 잠식해나갔다. 

그러나 불안은 아니다.



불안은 내게 직접적으로 고통을 주었다. 아무 이유 없이 배가 아프고, 밖에 나갈 때마다 머리가 아프고, 망상하게 만들고, 내가 만들어낸 망상에 고통받게 만드는.. 내가 내 삶에 몰입하지 못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나는 남들보다 낯선 환경에 대한 불안이 더욱 심했다. 나 같은 철없는 사람은 사회에 나가자마자 바로 낙오될 것만 같았다. 나는 나에 대한 칭찬을 칭찬이라고 맘 편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소위 말하는 '꼬인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나에게 주는 애정이 싫었으며, 혼자 있고 싶었으며, 모든 사람들이 나를 비꼬는 것 같았다. 인정받고 싶었지만, 막상 인정해주는 사람들을 가식이라며 쏘아붙였다.


나는 도전을 하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도전은커녕 일상생활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생각이 많고, 망상이 지나치게 많고, 이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나의 객관적인 현실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며, 도전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그래서 도전을 더욱 하려고 했다.



이상하지?





내가 남들이 향하는 길에서 홀로 빠져나온 후, 오롯이 나 혼자 내가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 만한 길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사회불안이라는 키워드가, 오랜 시간 잊고 있었던 그 증오스러운 키워드가 다시 내 머릿속에 은근하게 스며들어온다.


보통 사회불안이라고 하면.. 낯가림이 지나치리만큼 많고, 밖에 나가는 것조차 무서워하고, 인간관계를 맺는 걸 극단적으로 싫어해 일상생활에 방해가 될 정도로 불안해하는 것을 말한다.


나는 그 정도는 아니다. 어중간했다. 모호했다. 모순적이었다. 그래서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다.


나는 낯가림이 없으면서도 있다. 밖에 나가는 걸 좋아하지만 두려워했다. 나는 처음 보는 사람에겐 말을 걸 수 있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을 마주치면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사랑을 하지 못했다. 사랑하는 부모님 앞에서 가장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 자신조차 나의 고통에서 고개를 돌렸다. 


내가 불안해하는 것은 타인의 존재가 아니었다. 사회. 사회 그 자체. 

나에 대한 사회의 낙인이었다.



나는 사회로 나가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길 진정으로 원했다. 

당당하게 살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사회에 나가기엔, 나는 아직 철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전공. 인맥. 스펙. 학점. 그런 것들 아무것도 없이 나홀로 이 드넓고 험난한 황무지를 맨발로 걸어다니는 느낌. 나를 보호해줄 만한 장비 같은 건 아무것도 없다. 내려가는 자존감에 점차 친구들과도 연락을 끊게 된다. 공대에 다니던 친구가 대기업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먼저 문을 박차고 뛰어나온 주제에 간사하게도 시기라는 감정이 든다. 나는 역시 착해지기는 글렀다.


천천히라도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 발걸음을 한발짝 옮기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 밑으로 영원히 추락할 것 같은 느낌. 이 공허한 느낌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게끔 만든다. 발을 멈추고 눈앞의 어둠에서부터 마냥 눈을 돌린다. 불안하니까. 


이러한 불안을 내버려두면.. 얼마 지나지 않아 불안은 다른 모습으로 변화해간다. 적응해간다. 나는 그 불안의 미래를 알고 있었다. 나 자신이 정체되어 있다는 사실에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 


분리되었던 두 가지 색깔이 섞여 또다시 무감각한 잿빛이 되어갈 것이다.


나는 조금이라도 관리를 소홀해하면 금세 무기력에 익숙해지는 사람이니까.





나는 내 잿빛을 무감각한 잿빛에서, 기분 좋은 잿빛으로 바꾸고 싶다. 그렇게 확고하게 굳히고 싶다.


나는, 내 재능을 살리겠다.. 라는 그런 어줍잖은 생각은 잊어버렸다. 나는 내 재능이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 모른다.


내가 어떤 일을 하고싶은지.. 에 대한 생각도 전부 갖다버렸다. 나는 내 흥미가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 모른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가 사회에서 어떤 이미지로 각인되고 싶은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또다른 가면을 만들 준비를 시작한다. 그게 나에게 어울리는 고민 방식이었으니까.



도전과는 정반대에 서있던 나는 일부러 내 몸을 낭떠러지에 밀어붙임으로써 강제로 도전적인 사람이 되었다.


말을 하지 못하던 나는 일부러 내 몸을 낯선 사람들에게 집어던짐으로써 강제로 사교적인 사람이 되었다.


예민하고 신경질적이며 사소한 것에도 불안해하던 나는 일부러 내 머리를 스트레스 속으로 갖다바침으로써 강제로 시원시원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반항심이 깊은 사람이다. 심지어 나 자신에게도 말이지. 그래서 반대로 행동했다. 뭐든지.



나는 나의 나약함을 잊게 만드는 곳에 가고 싶다. 그럼 내 지금까지의 삶과 반대될만한 곳은 뭐가 있을까?


생각 많고, 예민하고, 말 못하고, 아직도 노트북 필기보다 수제 필기를 고집하는 아날로그적인 나와 반대되는 이미지. 가만히 앉아서 말없이 글이나 쓰는 사람이 갈 것이라고 흔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그런 곳. 남들이 다 아이팟과 아이패드로 무장하고 있을 때 아직도 홀로 유선 이어폰과 5년째 같은 폰을 고집하는 꼰대스러운 나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분야. 다양한 사람들의 글보단 내가 써낸 글=성과에밖에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나를 고칠 수 있는, 잡념이 지나치게 많아 20분짜리 유튜브 영상을 보는데도 열번 넘게 일시정지 버튼을 눌러대는 나를 사회에 맞게 고칠 수 있는 곳.


예를 들면.. 




IT? 





그렇게 해서 완벽하게 굳힌다. 내 안에서 피어난 두 가지 색깔의 꽃을 피워낸다.


나란히.

이전 19화 씨앗 이야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