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 속의 비밀
아르코스(Arcos) 민박집 옥상정원에 서서 드넓은 지평선을 바라보며 그동안 눌러왔던 나의 감정들, 슬픔과 미안함, 그리움, 아쉬움들을 흘려내고는 숙소를 나와 터벅터벅 마을을 구경하고, 돌아와 잠이 들었다.
다음 날은 새 날이었고, 일요일이었다. 론다(Ronda)로 가는 날이다.
아침나절 골목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 마시고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는데, 일하는 직원이 한 명도 없다. 주말이라 그렇단다.
매표소 창구는 닫혀있고, 안내 전광판 같은 것도 없이 버스만 제 스케줄대로 들어오고 나갔다.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는 승객도 한 두 명, 들어오는 버스에서 내리는 승객도 한 두 명, 넓지 않은 대합실과 승강장이 너무 한산하고 조용해서 오히려 불안해 보였다.
그전 같으면 누구라도 붙잡고 '여기 론다행 버스 타는데 맞죠?' 하며 시골 할머니처럼 물어보느라 분주했을 테지만 이제는, 시간 되면 내가 탈 버스도 오겠지 하는 마음이 되어 그저 편안하게 기다린다. 며칠 간의 경험에 의하면 스페인의 버스 스케줄은 대단히 정확했기 때문이다.
아르코스에서 론다까지는 마을과 마을을 돌아 정류장마다 다 들려서 버스로 약 1시간 반 정도 걸린다.
버스표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미리, 유럽 고속/시외버스, 철도 예매사이트 https://www.omio.com/에서 구매해 두었으므로 시간 맞춰 타기만 하면 되었다. 미처 구매하지 못한 경우에는 출발 전 목적지행 버스운전기사에게 직접 살 수 있다.
아무튼 시간 맞춰 버스는 왔고, 이제 출발이다.
승객은 다섯 명쯤이나 될까, 운전기사를 포함해 모두가 현지인이다. 얼굴 윤곽이 좀 밋밋하긴 하지만 노메이크업에 후줄근한 내 차림도 거의 현지인 수준이다.
처음 가보는 낯선 여행지에서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임에도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듯 괜히 정겹게 느껴지며 주책맞게 말을 걸고 싶어 진다. 늘 똑같은 일상에서 멀리 떨어져나와 완벽하게 나 혼자만이 갖는 오롯한 자유로움 때문일까, 입에서는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낮은 구릉지대를 구불구불 버스는 달리고, 차창 밖으로 시골길이 한가롭게 이어졌다.
작은 마을들을 거쳐서 돌고 돌아가다 보니 머리가 점점 어지러워지고, 속에서 마침내 꿀렁~ 솟구치듯 뭔가 올라왔다.
윽! 차멀미다. 아, 어떡하지...
굽이굽이 산 길인 줄도 모르고 스페인의 생생한 마을 풍경을 보고 싶다는 마음에 덜렁 시골 시외버스를 택했으니 멀미가 난다 해도 참고 견뎌야 할 뿐 어쩔 도리가 없다. 도대체 론다까지 얼마나 남은 거야?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올 것 같은 토사물을 엽기적인 그녀처럼 침과 함께 꾹 밀어 삼켰다. 이내 다시 올라온다.
일요일이라 버스운행이 단 한 번 밖에 없으므로 중간에 내릴 수도 없다. 운전기사분에게, 내려서 토하고 올 테니 잠깐 세워 달라 할 수도 없고, 식은땀은 나고, 뱃속은 네모난 상자를 집어넣은 듯 뻑뻑거리며 아프고, 큰일이다. 더더구나 토사물을 받아낼 비닐봉지도, 일회용 컵도 없고, 이러다간 결국 버스 바닥에 그대로 좌악~ 뿜어낼 텐데, 으흐! 안 되겠다.
급하게 배낭을 뒤져 바람막이 얇은 잠바를 꺼내 입을 틀어막으며 최대한 무음으로 '웩~'하고 토해 버렸다. 어찌하랴! 토해야만 속이 편해지는 것을. 아침에 카페에서 먹었던 진하고 맛있는 커피와 잘 구워진 토스트가 한데 섞이고 뭉그러져 멀건 죽이 되어 나타났다.
잠바를 둘둘 말아 새지 않게 잘 포개서 다시 배낭에 넣었다. 감쪽같다. 나만 말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다행히 승객 중 누구도 본 사람은 없다, 흐흐흐.
토하고 나니 속도 편해지고 머리도 개운해졌다.
휴~~ 살 것 같다.
다시 창 밖의 한가로운 거리풍경이 눈에 들어오고, 이런 여행이 솔솔 재미있어졌다.
버스가 제아무리 덜컹거려도 나는 이제 괜찮았다.
무사히 론다에 내려 에어비앤비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잠바를 물에 헹군 다음 세탁기에 처넣고 돌려버렸다. 나만 아는 비밀이 잠바와 함께 통 안에서 급격하게 세척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