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증의 친정집
옥상정원에 서서 지평선을 멀거니 바라본다.
머릿속에서 생각들이 구름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고, 가슴속 눌러왔던 감정들이 바람처럼 일렁거렸다.
아버지는 내 존재의 원천이며, 동시에 썩은 뿌리였음을 인정한다. 나에게 불우한 어린 시절을 남겨주고, 우울한 어른으로 살게 한 아버지, 엄마가 돌아가신 후 나 혼자 조용히 썩은 뿌리를 끊어냈다. 끊어낸 자국이 흘깃거리며 종종 마음을 괴롭히지만, 따지고 보면 잘려 나간 힘없는 기억에 불과하다.
나는 덜, 그럼에도 여전히.... 조금 우울하다.
2017년 여름, 엄마의 장례를 치르고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아버지의 집으로 향했다.
오래된 이층 양옥집.
1층에 방 세 개, 2층에 방 두 개인 것을 모두 세를 주고 엄마는 안방에서, 아버지는 작은 방에서 지내던 집이다. 마당에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고, 좁고 가파른 콘크리트 계단 밑에는 건물을 통틀어 하나밖에 없는 재래식 화장실이 있다.
엄마는 몸을 사리지 않고 온갖 일을 다해서 돈을 모아 전세로 주던 방을 월세로 돌려 생활비를 해결했다. 떠도는 들개처럼 언제 집을 나갔는지 모르고 언제 들어올지 알 수 없는 아버지에게 안정된 월수입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낡은 집이라서 들어오는 월세가 많지 않았지만 엄마의 형편은 차츰 안정되어 갔으며, 집을 고치고 수리하는 것도 오롯이 엄마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엄마는 남편이 있어도 없는 듯이 그렇게 혼자서 우리 사 남매를 키우며 살았다.
그 집에 엄마의 물건들은 생각보다 많았고, 함부로 버리면 안 될 것들도 있었다.
아까부터 뭔가 할 말이 있는 표정으로 문지방 근처에 앉아있던 아버지가 나를 흘끔 보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엄마가 갖고 있던 통장에 얼마 있는 줄 아냐?'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듯한 물음이었다.
'얼만데요?'
아버지의 얼굴에 순간 희열이 번뜩였는데 눈은 숫자를 상기하는 듯 반짝거렸고, 입꼬리는 지체 없이 위로 치켜졌으며, 드러난 이빨 사이로 소리 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손가락 다섯 개를 활짝 펴 보이며 특급 비밀이라도 말하는 듯 아주 작게 '오. 천. 만. 원!' 하는 것이다.
자식 앞에서 숨기려 하지도 않는 아버지의 들뜬 기쁨을 나는 보고 말았다. 악마가 있다면 저런 표정일까? 애정 없는 줄은 알았지만, 평생을 대신 고생한 아내의 죽음에 슬퍼하기보다 남겨진 돈에 기쁨을 감추지 않는 사람이 내 아버지라니! 속에서 악이 뻗쳐 올랐다.
'엄마가 그 돈을 어떻게 모았는데요, 도시락 두 개씩 싸들고 사방공사 따라다니며 죽어라 일해서 모은 돈인데, 그게 아버지 쓰라고 남겨둔 돈인 줄 알아요?'
열심히 살아온 엄마였다.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남편을 대신해 아이들 넷을 건사하며 질기게 살아온 엄마에게 남겨진 것은 갑작스러운 죽음과 모으기만 하고 쓰지도 못한 돈 6천만 원, 그리고 인정머리 없는 남편의 광기 어린 웃음이 전부였다.
악마를 본 이상 이제 이 집에 다시 올 이유는 없었다.
엄마가 없는 친정집.
내가 스무 살 때 이사 와서 살다가 결혼하면서 떠나온 곳이다. 피해의식이 심했던 엄마는 커다란 거실창문을 한 번도 활짝 열어놓지 않았었다. 여름에는 꽁꽁 닫아놓은 창문 때문에 더웠고, 겨울에는 웃풍때문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자야 했던 곳, 어둡고 축축한 부엌에서 열악한 조리기구로 자식들에게 삼시 세끼를 해먹이던 곳, 우리 사 남매가 하나씩 차례차례 독립해서 나간 곳, 결혼 후 엄마가 보고 싶어도 가식적인 아버지가 보기 싫어 외면했던 곳, 엄마가 그렇게나 팔고 싶어 했지만 아버지 명의로 되어있어 팔 수도 없었던, 애증의 친정집.
엄마가 돌아가시고 1년도 채 안되어 아버지는 그 집을 팔았고, 화장실과 욕실이 집안에 있는 현대식 빌라를 사서 이사했다. 꼭 그래야 했을까!
엄마의 유골함을 들고 봉안소 상담을 받는 자리에서 목격한 아버지의 기행은 부끄러움을 넘어 참담할 정도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상담직원의 눈을 피해 가며 테이블 위에 올려진 사탕그릇에서 몰래 사탕을 한 움큼씩 쥐어 주머니에 넣고 또 넣는 아버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다.
젊어서는 어린 자식들이 눈에 밟혀 떨쳐 나올 수 없었고, 늙어서는 혼자 힘으로 헤어 나올 수 없었던 감옥 같은 결혼생활, 켜켜이 쌓였을 엄마의 외로움이 느껴졌다.
엄마처럼 열심히 살아온 결혼생활 33년, 나는 어떤가?
..........
명백한 것은 나는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고, 엄마의 인생을 끝까지 닮지 않기 위해서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열심히'를 버리고, '즐겁게' 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