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잘 찾았는데, 어라!
카디즈(Cadiz)는 타파스바로 유명한 작은 해안가 마을이다.
타파스는 얇게 썬 바게트빵 위에 치즈나 과일, 해산물 등을 올린 것으로, 와인 또는 맥주와 함께 먹는 스페인 대표 전통음식이다. 종류도 엄청 다양하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카디즈에서 북쪽으로 약간 올라간 산골 마을로 카디즈보다 더 작은 동네, 아르코스 프론테라(Arcos Frontera)다. 숙소를 찾다가 알게 된 곳인데, 사진에 나온 마을 풍경이 그림같이 예뻐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세비야에서 그곳을 가려면 고속버스를 타고 카디즈 근처인 제레즈(Jerez)에 내려서 시외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노선은 단 하나이고, 게다가 주말에는 운행 횟수도 하루에 한 번밖에 없다. 일정을 잡다 보니 그날이 토요일이었다. 일요일인 내일은 론다로 갈 예정이었으므로 타고 나오는 버스도 하나밖에 없을 것이고, 카디즈에서 직접 론다로 가는 것보다 훨씬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 그럼에도 굳이 그 산골 마을을 가려고 하는 나는 한마디로, 단순한 삶을 추구하면서 취향은 더럽게 복잡한 사람이다.
아르코스 시외버스 터미널에 내려서 배낭을 둘러메고 언덕길을 올라간다. 작은 자갈을 촘촘히 박은 도로는 밟기 아까울 정도로 예쁘고, 노란 페인트 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확실하다.
언덕을 오르는 동안 도로는 점점 좁아져 골목길이 되었다. 1차선이므로 자동차를 운전해서 올 경우 직진만 가능하다. 아니면 양보를 위한 하염없는 후진이나....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걸어서 이동하거나 스쿠터를 타는 것 같다.
성당 후문에서 언덕길이 꺾어지고 작은 광장과 함께 제법 왁자해 보이는 레스토랑 골목이 나타났다.
관광지가 아닌 조용한 시골이었으므로 비로소 스페인 정통의 요리를 맛볼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국에서 시골길을 걷다가 마을 사람들만 아는 오래된 할머니 국밥집을 만난 느낌이었다.
주인장이 다가와 주문을 받는다. 메뉴판을 받았지만 스페인어라서 읽을 수도 없다. 음.... 빠에야?
노랗게 볶아진 해물 볶음밥이 냄비 가득 푸짐하게 담겨 나왔다. 곁들여 나온 올리브 절임도 자극적이지 않고 오이처럼 상큼하다. 평점 5/5. 밥알 하나 남기지 않고 싹싹 다 먹을 만큼 맛있었다.
식당을 나와 좁은 골목길을 천천히 구경하며 걷는다. 떨어져 나간 담벼락 너머로 저 아래 들판이 보였다.
이십 대 초반의 어느 날, 엄마가 퇴근하고 온 내게 아버지의 뒤를 밟으라고 했다. 엄마 말에 의하면, 더불어 내 기억에 의하면 아버지가 바람을 피우지 않은 시절은 없다. 그래도 그렇지, 다 큰 딸에게 아버지 미행을 시키다니. 남편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찼던 엄마는, 딸이 아버지 외도의 증거수집 및 목격자 노릇을 해도 상관이 없었나 보다.
중학교 때였나, 그때는 언니와 둘이 아버지를 미행했다. 언니가 결혼을 했으니 이번엔 나 혼자였다. 퇴근하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시간 차를 두고 아버지 뒤를 따라나섰다. 아버지가 집 뒤로 이어지는 골목길로 들어간다. 나도 따라간다. 담벼락에 몸을 숨기고 아버지가 좀 더 앞서 가기를 기다렸다. 아버지는 같은 속도로 걸었고, 나도 같은 속도로 따라 걸었지만.... 중학교 때처럼 어느 골목에선가 아버지를 놓쳤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주춤거리다가 되돌아왔다. 바람을 피우려면 멀리서 하던지, 한 동네 몇 골목 건너라니.
대학교 들어가기 전 5년 동안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면서 받았던 내 월급은, 아버지가 띄엄띄엄 주는 부족한 생활비를 메꾸기 위해 엄마에게 모두 들어갔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 내게 남은 것은 당장 납부해야 할 입학금과 4년에 걸쳐 내야 하는 등록금에 대한 걱정이었다. 등록금은 졸업과 관련된 것이므로, 그것은 내게 공부 스트레스보다 더 큰 것이었다.
등록금이 없어 졸업이 불투명한 대학생, 사랑과 믿음이 없어 딸이 아버지를 미행해야 하는 무너진 가족..... 심카드가 없어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주머니 속 내 휴대폰. 그때나 지금이나.
심카드를 끼워 넣듯 6개월 만난 남자와 대학교 2학년 때 결혼했다. 그리고 등록금 걱정에서 해방되었다.
걷다 보니 숙소에 도착했다.
어.. 키패드에 비밀번호를 입력하라 했는데...
미리 문자로 알려준 내용을 보며 번호를 넣는데 잘 안된다. 다시 해본다. 안 된다. 어떡하지...
한낮의 조용한 시골 주택가 골목, 다른 집들 모두 문이 굳게 잠겨있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 큰일이다.
혹시라도 안에 사람이 있을까 하여 문을 두드려 본다. 기척이 없다. 심카드 없는 휴대폰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 단 한 번이라도 로밍을 쓰면 한 달에 무조건 100불이 추가된다. 숙소에 들어가면 인터넷이 공짜인데...
어려운 골목길을 돌고 돌아 집은 잘 찾았는데 정작 도어록을 열지 못해 들어갈 수 없는 이 어처구니!
배낭을 문 앞에 내려놓고 한참을 서성였다.
그냥 로밍을 쓸까 하던 그때, 숙소 바로 앞집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청소년 또래의 남자아이가 나왔다. 아! 궁하면 통한다더니. 동아줄을 움켜잡듯 다가가 도움을 청한다.
익스큐즈미?
남자아이가 경계심 1도 없는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나는 너네 동네를 여행 중이고 오늘 이 집에서 하루 잘 건데 문이 잠겨서 들어갈 수가 없거든, 그리고 말이지 지금 마이폰이 안 돼서 집주인한테 폰콜을 할 수가 없는데 너가 너 폰으로 연락 좀 해줄래 걔 폰넘버는 여기 있어.'
이러한 내용을 담아 영어 반 몸짓 반으로 도움을 청했다. 아이가 집으로 들어가 누나를 데리고 다시 나왔고, 누나 손에는 전화기가 들려있었다. 누나가 번역기 앱을 이용하여 상황을 대충 파악하더니 집주인 '호세(Jose)'란 놈에게 전화하는 것 같다. 아~ 이제 살았다!
영어를 할 줄 아는 호세는,
자신은 직장 근처에 살기 때문에 당장 올 수 없고, 숙소 가까이 살고 있는 아빠가 대신 와서 열어줄 테니 잠깐만 밖에서 기다리라고 한다. 오케이 오케이~
내게서 전화기를 돌려받은 친절한 남매는 별 일 아니라는 듯 집 안으로 사라지고, 십분 정도 지나자 스쿠터를 탄 아저씨가 헐레벌떡 달려와서 굳게 잠겨있던 문을 1초 만에 열어 주었다.
삑 삑 삑 삑, 삐리릭~~
5성급 호텔 부럽지 않은 아늑한 숙소의 내부가 샤랄랄라~ 나를 반겼고, 호세 아버지는 '유온리원'이니 '얼유어스'라, 편하게 맘껏 이용하라 말하고는 친절한 남매가 했던 것처럼 무심한 듯 쿨하게 돌아갔다.
석류나무 화분이 있는 아름다운 옥상정원과 그 아래 펼쳐진 드넓은 들판은 온통 내 차지였다. 모든 것을 품어줄 듯 지평선은 포근했고, 한동안 나는 탁 트인 지평선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대문사진 출처: Pixabay로부터 입수된 Ornán Rodríguez Velázquez님의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