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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랜턴 Oct 05. 2024

상그리아는 내게 술이다.

알코올 분해작용을 전혀 못하는 몹쓸 몸

하루 지났다고 벌써 낯선 것에 대한 긴장도 슬슬 풀리고 마음은 훨씬 더 자유로워졌다.


오늘은 세비야에 있는 한인민박집에서 묵을 예정이니 한식을 먹을 것이요, 편하게 한국말로 소통하면 될 것이다. 2박에 아침 포함해서 가격은 약 10만 원 정도(2019년 가격), 1인 1실이 아니므로 화장실은 당연히 공용이다.


코르도바 에어비앤비에서는 욕실이 딸린 2인실을 혼자 사용했지만, 이후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에서처럼 한인이 운영하는 에어비앤비는 모두 방 하나에 싱글침대를 여러 개 놓고 같이 사용했으며, 화장실도 공용이라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1인실은 아예 없거나, 가격이 아주 비쌌던 것으로 기억한다. 프라이버시를 중요하게 여기는 외국인 운영의 에어비앤비와 차이 나는 점이다.


세비야 숙소에 도착하니 화장실 사용법과 아침 식사시간 등 간단한 규칙을 알려준다. 나머지는 자유롭게 이용하면 된단다. 친절하게 근처 맛집이 사진으로 담겨있는 바인더를 보여주고, 커피 맛이 좋은 카페도 일러준다. 마침 점심때여서 가장 가까우면서 찾기 쉬운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좋아하는 리소토를 주문하고 주변을 둘러본다. 테이블마다 시원한 상그리아를 마시고 있다. 술은 마시지 못하지만 과일조각이 들어있는 것이 예쁘기도 하고, 주스처럼 만만해 보이기에 나도 한 잔 시켜봤다.


상그리아는 레드와인에 과일 조각을 넣은 음료수 같은 것인데, 술을 전혀 못하는 내게 그것은 술과 다름없었다. 채 3분의 1도 못 마시고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조금 더 마시면 다리 힘이 풀릴 것이고, 더 마시면 토할지도 모른다. 그러고 나면 벽과 바닥이 빙글거리며 내게 들이대겠지!


소주 한 병 정도는 마실 수 있는 체질이기를 원했다. 술을 배우려고 노력했던 적도 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늘이고 늘여놓은 주량이 맥주 두 잔이었으나, 이제는 그 조차도 마시지 못한다. 우선 술이 맛이 없고, 왜 마시는지를 모르겠으며, 마셔서 기분이 좋아지기는커녕 속이 울렁거리고 호흡이 가빠지며 머리만 아프다. 술 배우기를 그만두었다.


알코올분해작용을 전혀 못하는 아버지의 DNA를 물려받은 것이 짜증스럽다.


볼이 벌게지면서 부어오르는 느낌이다.

이러다간 오후의 여행을 망치겠다 싶어 반도 더 남아있는 상그리아를 그림처럼 남겨두고 식당을 나왔다. 뭐, 맛을 봤으면 됐지. 캬~ 시원하고 달달하니 맛있었다!

알코올 냄새와 후끈거림만 없었으면 딱인데.... 그러면 술이 아니라 주스이겠지만.




한 모금 상그리아의 흥에 맞춰 살랑살랑 걷다 보니 누에바 광장(Plaza de Nueva)이다. 저만치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붉은 레이스 치마를 입은 집시여인의 움직임과 구두굽의 또각거림이 들려온다.


아! 이 무슨 횡재인가!

말로만 듣던 집시의 춤을 이렇게 길거리에서 보다니.



여인의 몸놀림에 맞춰 레이스가 현란하게 움직인다. 양손에 쥔 캐스터네츠와 구두굽의 리듬이 앙상블처럼 조화롭다. 흔들리는 음악과 율동에 균형을 잡기라도 하는 듯 여인의 눈은 깊고도 조용하다.


춤을 끝낸 집시여인은 적극적으로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 초라한 행색은 처량하기보다 오히려 편안해 보였다. 속박이나 규율, 책임, 의무, 희생, 헌신 따위의 거창한 것들을 버리고 오로지 겸손하게 자신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있었다.


이런 건 공짜로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지갑을 열고 몇 유로를 준 것 같다.

그녀의 플라멩코는, 이후 그라나다 집시 마을에서 관람료를 내고 보았던 플라멩코에도 전혀 뒤지지 않았다.


맛있다는 상그리아도 먹어보고, 집시의 플라멩코도 보고... 처음 느껴보는 자유와 호사로움으로 마음이 스멀스멀 간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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