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지는 친정 엄마의 변론
싸가지 1.
딸에게 문자 했다.
오늘 11시까지 갈게, 괜찮아?
딸이 단숨에 답문자를 보내온다.
아니, 안 괜찮아! 그럼 내가 정리를 언제 해! 엄마 오면 점심 먹고, 치우고, 애기 재우고, 그럼 저녁 준비하고, 그럼 큰 애 올 거고...
이런 싸가지!
어제는 나보고 아무 때나 와도 된다고 해놓고. 그래서 느긋하게 커피 한잔하고 11쯤 갈려고 했더니 저 난리네. 그럼 아예 일찍 오라고 하던지. 그리고, 말 좀 공손하게 하면 안 되냐!
딸의 싸한 말투에 나도 입 속으로 툴툴대지만 내 몸은 벌써 딸네 집에 갈 채비를 하느라 분주해진다.
아직 이삿짐 정리가 끝나지 않은 딸이 아마도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다. 이사 전 후로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많고, 아이들이 있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정리되지 않은 집안 꼴에 심사까지 뒤틀리는 모양이니, 내 설거지는 뒷전으로 남겨둔 채 부랴부랴 집을 나선다.
싸가지 2.
딸네 집에 들어서니 현관에 죽 늘어놓은 쓰레기 박스들이 나를 기다린다. 일관성 없는 물건들과 서류뭉치들, 아이들 옷이 계단 층층마다 놓여있고, 주방 아일랜드 옆에는 버릴 건지 중고 처리할 건지 모를 담요와 옷들이 쌓여있다. 아이들 놀이방 모습도 다르지 않다. 장난감과 책들이 뒤섞인 채 바닥에 쏟아져 있고 발 디딜 틈도 없다. 깔끔한 나의 본성과 하나라도 더 치워주고 싶은 나의 모성이 살아나 계단 위 물건들을 싹 치우고 쌓여있는 옷과 이불 등을 말끔히 정리했다. 별로 시간이 오래 걸릴 일도 아니다.
딸-엄마! 저 옷은 어린이집에 보낼 거고, 이불은 지하로 내려갈 거고, 애들 옷은 세탁기에 넣어 돌릴 거야, 내가 다 분류해 놓은 건데.... 휴... 우리 집에 오면 정리 좀 하지 마! 엄마가 그렇게 치우면 내가 일을 다시 해야 되고 물건들을 다시 찾아야 돼. 이렇게 해놓으면 내가 어떻게 찾아.... 휴... 엄마도 우리 시어머니랑 똑같애, 자기 맘대로 물건 정리하고...
이런 싸가지!
니들이 새 집으로 이사 와서 돈 들어갈 일이 많고 스트레스받는 건 알고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해대냐! 그러면 오라고 하지를 말던가!
속으로만 고함치고 입은 꾹 다문 채다. 그래도 이건 좀 심하다 싶어 나도 맘이 조금 상했다.
나-저녁 준비 다 해놨으니까 니들끼리 먹어, 박서방 퇴근하고 오면 엄마랑 아빠는 갈게.
딸-.... 저녁 먹고 가.
나는 딸네와 함께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모두 끝내고 남편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싸가지 3.
딸-엄마, 1층 바닥에 내려놓은 물건들 중에 엄마가 쓸 거 있으면 쓰고, 아닌 거는 중고마켓에 팔면 돼.
무엇이 있나 봤더니,
얼룩덜룩한 바닥 러그, 이름이 쓰여있는 바인더 3개, 먼지 때 끈적한 볼펜 꽂이, 기름때 꼬질한 와플 기계, 애들도 안 쓸 종이 필통, 방송국 로고가 선명한 보석함, 내 집에도 수두룩한 작은 냄비들......
이런 싸가지!
누가 봐도 분명한 쓰레기들을! 내가 쓸 거도 없다만, 중고마켓에 내놔도 누가 살까 싶은 것들을 가져가라고! 팔려면 기름때라도 닦아야 되고, 먼지도 닦아놔야 하는데 그냥 이렇게 던져놓다니!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하지 않는다. 버려도 내가 버리는 게 쉬우므로 모조리 싣고 집으로 가져왔다.
반전 부록
딸-엄마~ 내가 짐 정리하다가 미국 달러를 찾았는데, 한 250불 정도 될 거야, 엄마 써!
나-으잉, 웬 미국 달러! 어이구 좋지~
딸-ㅎㅎㅎㅎㅎ
나-ㅎㅎㅎㅎㅎㅎ
친정 엄마의 변론
나의 둘째 딸은 절대 싹수없는 아이가 아니다. 항상 엄마를 측은해하고,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어 하고, 멀리 유학 중에도 나의 생일을 꼬박 챙겼던 사려 깊은 아이다. 다만 육아에 치이고, 갑자기 많아진 할 일들, 그리고 경제적인 압박 등으로 한꺼번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내게 못되게 말하고는 저도 마음이 아파 며칠을 미안해했다. 나도 그 마음을 안다. 그래서 옛날 나의 엄마가 내 싸가지를 받아준 것처럼, 나도 사랑하는 내 딸아이의 싸가지를 말없이 받아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