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미라도 언덕에서 보는 일몰
그라나다 시내에서 탄 미니버스는 산 언덕을 올라 알람브라궁전 입구에 나를 내려준다. 예약된 관람시간은 2시 30분이다. 걸어서 올라가도 되지만 언덕은 몹시 가파르게 보였고, 더욱이 궁전을 구석구석 둘러보기 위해서는 다리 힘을 아껴야 했으므로 버스를 이용한다. 버스는 언제나 청결하고, 안전하고, 정확했다.
헤네랄리페 정원, 나사리 궁전, 알카사바, 카를로스 궁전 순으로 관람할 예정이다.
오전에 그라나다 골목을 다니며 이미 배터리를 다 써버린 내 오래된 휴대폰은 더 이상 카메라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궁전의 생생한 모습을 담는 것은 애저녁에 포기하고 대신, 카를로스 궁전에 있는 기념품샵에서 프로 작가의 정형화된 한글판 사진첩을 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사진촬영에 구애받지 않고 알람브라의 아름다움을 실컷 눈과 마음에 담아 보기로 한다.
헤네랄리페(Genealife) 정원을 넋을 잃고 보다가 입장 시간 임박해서 나사리 궁전 입구로 달려갔다. 드디어 입장이 허락되었고, 내 눈도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사자의 정원, 공주의 방, 왕의 집무실...
아! 어떻게 기둥이, 어떻게 천정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그 옛날 저런 타일은 어떻게 만들어 냈을까!
기가 막히게 짜 맞춘 기하학적 형태와 빈틈없이 다듬어진 종유석 문양까지, 나사리 궁전 전체가 하나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보석 같았다. 수로로 이용되는 사자의 분수 물줄기는, 마치 가느다란 선율에 따라 잔잔하게 움직이는 무용수의 율동처럼 보인다.
궁전 내부를 샅샅이 눈에 담고 밖으로 나와 알카사바(성)로 가는 길, 공주가 갇혔었다는 전설 같은 비운의 탑을 올려다본다.
다시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서 잠시 쉬며 휴대폰을 충전하기로 했다. 미라도 언덕(Mirador San Nicolas)의 성 니콜라스 교회 앞에서 보는 멋진 일몰과 알람브라궁전의 야경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미라도 언덕은 숙소 바로 뒤였다.
언덕 위 교회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로 왁자하다. 나도 그렇지만 어찌들 알고 그렇게 찾아오는지.
건너편으로 알람브라 궁전의 주황빛 성벽이 보였다. 두꺼운 구름 때문에 일몰은 그다지 환상적이지 않았지만, 일몰을 보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의 분위기는 자못 들떠 있었다. TV가 흔하지 않던 어린 시절, 김일 레슬링을 보기 위해 마루 앞에 모인 어른과 아이들처럼 소란스러웠으며, 또 그렇게 모두가 다정해 보였다.
어둠이 짙어지면서 궁전 외곽에 등불이 점점 밝아졌고, 알람브라는 노란 보석이 되어 다시 빛이 났다.
알람브라 궁전의 아름다운 낮과 밤을 모두 보면서 그동안 품고 있었던 막연한 호기심이 풀렸다. 상상으로만 끝날 줄 알았던 신비로움도 해소되었다. 그날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였던 그라나다를 지웠다. 뿌듯했다.
평소 드러내기를 싫어하고 누가 들여다보는 것 또한 싫어하던 내가, 일몰을 보기 위해 모여든 낯선 사람들에게 아무런 저항 없이 마음을 열고 있었다.
감격스러운 장관을 함께 보며 마음을 나눈 것에 대한 행복감 때문일까?
혼자 왔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위안 때문이었을까?
달콤한 밤공기를 음미하며 언덕을 한참 거닐다가 늦게 숙소로 돌아왔다.
아름다운 내 사랑 그라나다의 마지막 밤이 깊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