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이야 옥이야 더할 나위 없는 애지중지
사 먹는 반찬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면서 요리하는 것도 그다지 즐겨하지 않는다. 한 때는 요리에 대한 불타는 의욕으로 다섯가지 김치를 담그고 12첩 반상도 차려냈지만, 살림이 물린 지금은 누가 내 먹을 밥 좀 해준다면 주방을 내어주고 싶을 정도다.
그래도 꾸역꾸역 집에서 해 먹는 편인데 귀차니즘이 발병되는 날엔 사다 먹는 것 외에 어찌할 도리가 없다. 나야 가난한 집 태생이니 밥에 국 하나로 세끼도 해결하지만, 왕년에 부잣집 장남이었던 남편에게 똑같은 국과 반찬으로 세끼라니, 어허! 큰일 난다. 많이 길들여진 지금은 두 끼 정도는 가능해졌으나 그리 행복한 표정은 아니다.
요리라기보다는 딱 먹고 살 정도로만 음식을 하는 요즘 우리 집 밥상은 메뉴 돌려 막기 수준이다.
된장찌개, 해장국, 뭇국, 미역국, 감자탕, 오징어찌개....
오이생채, 두부조림, 고등어구이, 멸치볶음, 나물무침....
삼시 세 끼는 아니어도 한 달에 최소한 60번 이상 차리는 밥상을 식당도 아닌 일반 가정집에서 때마다 새로운 메뉴로 채울 수는 없다. 결국 해 먹던 것 중에서 섞어먹고 돌려먹고 비벼먹고, 같은 반찬 또 먹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면서 한편,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다.
마트에 가면 남편은 늘 반찬코너 밑반찬들 앞에서 머리를 주억거리며 서성댄다. 사고 싶다는 뜻이다. 진열되어 있는 반찬의 종류가 항시 같으므로 사 오는 반찬도 늘 같다. 콩자반, 멸치볶음, 북어포 무침, 고추절임, 무말랭이... 그럼에도 남편은 매번 사고 싶어 하는 눈치를 보인다. 내가 해준 반찬은 똑같다며 싫어하고, 반찬가게 반찬은 똑같은 걸 매번 사 온다.
반찬가게의 늘 똑같은 반찬과 내 반찬의 늘 똑같음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 걸까? 남편이 머리를 조아리는 반찬가게의 반찬과, 방자하게 젓가락을 휘적이며 대하는 내 반찬은 무엇이 다른 걸까?
집 근처에 반찬전문점이 새로 문을 열었다. 종류가 훨씬 다양하고 심지어 국까지 있다.
소문으로만 듣고 지내다가 1식 3찬의 날들이 이어지자 남편이 은근히 말을 꺼낸다.
'거기 한 번 가볼까, 뭐가 있나 볼 겸?'
겉절이 배추김치, 오이소박이, 홍어무침, 마늘장아찌, 콩자반, 고추절임, 김치 해장국, 육개장, 사골국, 단호박 식혜. 남편이 발걸음도 신나게 그날 가서 사 온 반찬들이다. 이 중 두어 가지는 나의 입맛을 겨냥해서 사 왔다나!
'뭐부터 먹을까, 김치 해장국? 육개장?'
사온 반찬을 접시에 덜어 이쁘게 상까지 차려낸다. 남편의 입꼬리는 소리 없는 리듬을 타며 실룩거리고 어깨와 몸짓은 돔칫 돔칫! 숨길 수 없는 율동이 흐른다. 따뜻한 밥을 공기에 소복이 푸고 나서 뜨끈한 김치 해장국을 한 대접 퍼온다. 이내 맛있게 먹고 있다는 요란한 '쩝쩝' 소리가 개선장군의 나팔소리처럼 주방에 울려 퍼진다. 내가 해준 밥과 국과 반찬을 먹을 때는 분명 처절한 패잔병의 자세로 앉아 냉랭한 기운만 흘렀더랬다.
남편은 똑같은 국과 반찬으로 그날 저녁을 또 먹었고, 다음 날 아침에도 식은 국을 데워서 말끔하게 먹어 치웠다. 같은 반찬을 무려 세 번을 먹었다.
그것도 경쾌하게, 연이어서.
내가 끓였던 해장국보다 월등히 맛있지도 않은 반찬가게 해장국을 군소리 없이 연달아 먹는 남편에게 배신감마저 들었다. 그 많던 '어제 먹었는데 또 먹어!' 따위 말은 다 어디로 갔을까? 똑같은 오이소박이던데 남편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 내 생각을 해서 사 왔다는 시큼한 홍어무침은 벌써 저 혼자 다 먹어버린 지 오래다.
'점심에는 육개장을 먹을까, 사골국을 먹을까?'
아, 맘대로 하시구랴!
내 반찬을 반복해서 먹을 때는 '뭐 있어? 그거밖에 없잖아.'였는데, 반찬가게 반찬을 먹고 또 먹을 때는 '남은 거 있잖아, 그거 먹어도 돼!'라고 말한다. 내가 해준 떡과 남의 떡의 차이가 남편에게는 이렇게나 큰가 보다.
..... 오호라! 다른 여자의 손 맛이 보고 싶은 거였군!
그래 좋다, 나도 땡큐다. 이참에 반찬가게 반찬으로 아주 주욱~ 대놓고 먹어보자.
대문 사진 출처 : Unsplash의 Kim Deach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