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는 누구일까?
시아버지가 살아계셨던 불과 몇 년 전,
명절을 맞아 남편 형제들과 시누이, 조카들까지 아버님댁에 다 모였던 적이 있다.
제일 멀리 살면서 제일 먼저 온 막내 동서네,
뒤를 이어 들어온 둘째 동서네,
맨 나중에 온 시누이 식구까지 해서 좁은 집 안이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로 꽉 찼었다.
차례를 지낸 후 여자들은 설거지와 뒷정리를 하고, 아들들과 사위는 아버님 모시고 당구 한 게임한다며 나가고, 조카들 젊은 세대는 근처 카페에 가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공간이 정리되었다.
설거지를 끝내고 안방에 모여 앉은 여자들이 커피를 마시며 배틀을 시작하는데,
막내 동서가 먼저 포문을 연다.
'저희 오늘 아침에 오면서 차 안에서 싸웠어요.....
우리 지금 말 안 하잖아요, 서로......
아니, 큰 형님이 음식 하는 건 알아서 하신다고 했는데, 왜 자기가 아침 일찍부터 고기를 삶고 찢고 하냐고 계속 뭐라 했더니, 화가 나서 욱해갖고 차를 주먹으로 내리친 거 있죠. 그래서 피나고.....
밴드 붙였잖아요 손에.....
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고.....
이번엔 제가 먼저 화 안 풀 거예요.....
형님은, 싸우고 나면 먼저 미안하다 하고 사과하세요?'
둘째가 대응한다.
'나는 살면서 여태껏 미안하다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어, 잘못한 게 없는데 뭐.
서방님은 아무것도 아냐 동서, OO 아빠는 맨날 무슨 술을 그렇게 먹는지.....
술만 먹으면 항상 사고를 치고 다녀서......
말끔하게 입혀서 출근시키면 꼭 술 취해서 옷 다 망가져서 오고....... 술 먹으면 왜 바지 앞 쟈크는 그렇게 다 열어놓냐고…..
저번에는 술에 떡이 돼서 택시를 타고 왔는데,
보니까 바지에 똥을 싸가지고 옆에까지 다 묻히고...
아휴, 이 정도면 민폐 아녜요 형님!'
시누이가 이어받는다.
'고서방(시누이 남편)은 얼마나 나쁜데.....
근데 사람들은 이 남자가 나쁜 줄을 몰라....
아주 교묘하게 나빠.
언니는 알지 고서방이 얼마나 나쁜지... 내가 전에 말했잖아.'
시누이가 날 쳐다본다. '응... 알지.‘
'우리가 한국에 나오는 게 다 시어머님 뵈러 오는 건데 내가 뭐가 좋겠어 내 친구도 못 만나보고....
내 생활은 없이 하루 종일 어머님 음식 수발들어야 하고..... 근데도 나한테 고맙다고 하기는커녕...
한 번은 뭐가 맘에 안 들었는지 화가 나서 글쎄,
카드랑 다 내놓고 이 집에서 나가래.
아휴~ 치사해서 진짜....
지 덕분에 내가 여태껏 고생 안 하고 사는 건 알지만'
맏며느리인 나도 질 수 없다.
'나는 집 나왔잖아. 한 달도 넘게....
결혼해서 30년을 살았는데, 오랜 세월 같이 살아온 배우자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전혀 없는 거야..... 그냥 자기 필요에 의해서 존재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함부로 대하는 게 싫더라고.....
이제는 자식 다 키워서 시집 장가도 보냈으니 내 책임은 다 했고, 아주 끝낼 생각하고 나왔어....
그랬더니 미안하다며 지 머리를 빡빡 밀어 버리더라, 잘못했다고.'
명절날은 동서들과 시누이가 모여 앉아 집안 남자들 패대기 하는 날이다.
이렇게 1년에 한두 번쯤, 명절은 이러라고 있는 거 아닌가!
어머! 어머! 하며 듣고 있던 막내 동서가 마침내 꼬리를 내린다.
'아휴, 형님들에 비하면 전 아무것도 아니네요. 호호호~'
질세라 또 각자 한 마디씩 보탠다.
둘째 동서가 먼저,
'막내네는 안 싸우고 잘 사는 줄 알았는데, 그 집도 그렇구나.'
시누이는,
'그래도 막내가 제일 착하고 가정적이야. 그냥 화해해.'
나도,
'서로 말 안 하고 그러면 불편하고, 집 안 분위기도 안 좋고 하니까 이야기하면서 풀어. 말 안 하는 거는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 돼.'
다음 날, 동서 시누 단톡방에 막내동서의 문자가 올라왔다.
'형님들~ 저희는 집에 잘 도착했어요. 저는 성격이 좋아서 벌써 다 풀었는데 욱 씨집 남자는 덜 풀렸나 봐요. 오면서 농담도 안 하고... 뒤끝도 있네요...
그래도 형님들하고 이렇게 얘기하니까 저는 좋아요.
형님들~ 사랑합니다~~'
들어주고 알아주기만 해도 이렇게 속상함이 풀리는데, 남편들은 왜 그걸 모를까!
남편들이 몰라주는 속, 여자들끼리 풀어가며 또 한 고비가 넘어간다.
명절날 동서들끼리 벌인 배틀에서 승자는 단연코, 패대기 당하는 줄도 모르고 당구볼 튕기며 놀고 있는, 존재감 막강한 남자들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