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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오징어를 씻다가 자존심까지 씻겼다.

엄마와 아들의 진검승부

by 블루랜턴

물론 엄마밥도 그립지만, 나는 아들밥이 그리울 때가 더 많다.


아들이 자주 해주던 라자니아가 그렇고, 파스타와 햄버거, 인도식 비프 카레도 그리웠다. 남편이 끓여주는 김치찌개가 전혀 그립지 않은 것을 보면, 이건 순전히 다른 사람이 해준 음식이라서 그런 것은 아닌 듯하다.


손맛이 좋은 아들은 일단 간을 잘 맞춘다. 요리는 간이 가장 중요하며, 맛을 책임지는 것도 간 맞추기가 반 이상을 차지한다. 능숙하게 요리하는 아들의 뒷모습은 내가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을 만큼 빈틈없다.


그러나 이건 오직 양식에 한해서다.


명색이 엄마이고 주부이며, 오랜 집밥요리 경력 보유자인 내가 순순히 주방을 내줄 수는 없다. 해서 일주일에 4일쯤 먹는 한식은 내 담당이고, 3일에 해당하는 양식은 아들이 주로 담당한다. 손맛 좋은 아들이 한식을 배우기로 쉽게 마음먹지 않도록 메뉴도 치밀하게 신경 써서 고른다. 이를테면, 감자탕, 잡채, 코다리 조림, 육개장 등이다.


언제였던가, 아들이 된장찌개를 제법 그럴듯하게 끓여내던 날, 한 술 떠먹던 나는 충격도 같이 먹었다. 너무 맛있었다. 수십 년 단련된 나의 요리 실력이 단숨에 와르르 무너지는 위기감마저 느껴졌다. 아들은 이제 김치찌개도 나보다 더 맛있게 끓여낸다. 집밥의 대표인 된장찌개와 김치찌개를 시작으로 슬슬 한식계까지 접수하는 모양새에 나는 더욱 단도리를 하는 것이다. 아들밥이 그리운 것은 사실이지만, 아들이 엄마밥에 대한 그리움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부질없는 욕심이 내 마음 어느 구석에 존재하는 모양이다.




선별한 메뉴를 돌려가며 해 먹다가 언뜻 오징어 찌개가 생각났다.

그렇지, 이것은 따라올 수 없지, 흐흐흐.


물오징어를 꺼내 손질해 놓고, 쌀뜨물로 육수를 만드는 중에 아들이 주방으로 왔다.

"엄마, 오징어 손질한 다음에 수세미로 싱크 닦았어요?"


예상하지 못한 기습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아들이 그럴 줄 알았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일격을 날린다.

"엄마도 아빠랑 똑같애!"


띠로리~~~

뭐라고? 아니 내가, 화장실 볼 일 보고 손도 안 닦는 느이 아빠와 똑같다고!


아들의 일갈에 남편은 좋아라 소리 높여 웃었고, 나의 자존심은 물오징어처럼 주르륵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아들은 생선이나 닭 등 날고기를 손질하는 즉시 쓰고 난 칼과 도마, 개수대 안과 카운터 위까지 뜨거운 물로 깔끔하게 닦아낸다. 생물을 손질하다 보면 카운터 위아래 물이 튀기 마련이고, 혹시라도 묻어있던 균이 같이 튀면 금방 오염될 수 있다는 이유다. 나도 가르치지 않은 것을 어디서 배웠는지, 급기야 나를 점검하려 든다.


"야채까지 다 다듬고 나서 닦으려고 했어."라고 변명해 보지만, 아들은 어느새 수세미로 개수대와 카운터 위를 싹싹 닦아낸다. 서슬 퍼런 행동에 내 자존심까지 말끔히 씻겨나간다.


아들의 행동은 요리의 기본자세로서 백 번 맞다. 모름지기 요리란 청결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한들,

기습적으로 나타나 허를 찌르고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최후 일격을 가하는 그런, 물오징어 껍데기 같은 얄팍한 수를 쓰다니!


그 정도로는 끄떡없다 이놈아!

내일은 맵디매운 불멸의 제육볶음으로 내 너를 응징해 주마. 어디 한 번 지옥불맛을 견디어 보거라!

며늘아, 부부는 한 몸이니 너도 함께 매운맛을 보거라! 쯧쯧.


나 혼자 입 속으로 전쟁을 치르며 구겨진 자존심을 겨우 추슬렀다.


사진출처: Pixabay로부터 입수된 형태 김 님의 이미지입니다.




주방 카운터를 박박 닦고 방으로 올라갔던 아들은 자신의 무례함이 스스로도 미안했던 모양이다. 며느리와 함께 저녁 식탁에 앉더니 쑥스러운 얼굴로 사과한다. '화 내서 미안해요.'


구수한 오징어찌개를 한 술 떠먹은 아들이 빙긋이 웃더니 한 마디 뱉어낸다.

"찌개 맛있네!"


나쁜 놈...






대문사진 : Pixabay로부터 입수된 Pexels 님의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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