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블루랜턴 Mar 05. 2024

조부모의 서열은 부모 다음이다.

지 새끼 지가 키우지 내가 키우나!

두어 달쯤이 지나, 

큰 손자가 다시 감기에 걸려서 열이 나고 기침도 심하다. 어린것이 연이어 기침을 토해내듯이 하는 걸 보면, 창자를 끊어내는 것처럼 나도 아프다. 


아픈 손자는 짜증도 심하다. 기운 없이 누워있는 것이 안쓰러워 손이라도 잡아주면, 이맛살을 찡그리고 나에게 주먹질을 한다. 나는 그것이 또 마음 아프다. 조그마한 몸으로 고열과 힘겹게 싸우는 것을 보면, 안아주고 업어주고 버릇이 없어지건 말건 뭐라도 해주고 싶다. 그런데 손자는 나의 자식이 아니다. 내 딸의 자식이니 내게는 내 맘대로 할 권한이 없다. 

 

열이 나고 기침하면 십중팔구 폐렴으로 가는데도 딸은, 폐렴은 기침소리가 다르다며 항생제를 안 먹인다. 체온계로 재보니 38.1도, 아직 38.5도가 아니라고 해열제를 안 먹인다. 이쯤이면 나도 화가 난다. 제 어미가 약사인데, 약사 말도 안 듣는 너는 대체 무엇이냐라고 속으로만 열불을 끓이다가, 결국 나 자신에게 일갈을 내지르며 스르르 제 풀에 놓아버린다. 


지 새끼 지가 키우지 내가 키우나!


© kellysikkema, 출처 Unsplash


마침내 병은 더 커지고, 아이는 힘에 부쳐 축 늘어졌다. 39도를 넘기고 나서 해열제를 먹이지만 열은 잘 내려가지 않는다. 이내 항생제도 먹여보지만 병균은 이미 막강해졌다. 지들은 나보다 더 많이 배운 요즘 세대라지만, 좀 안다는 것들의 '안다'는 것이 애를 힘들게 한다.


아이가 아프니 딸과 사위도 스트레스라 얼굴 표정도 어둡고 말투도 날카롭다. 밤새 잠 못 자고 일하러 나가고, 퇴근 후 집에 와도 아픈 아이 얼굴 보며 맘이 편치 않다. 그래도 저희 부부끼리 싸움은 없는 모양이라 다행이다 싶다, 나와 남편 같았으면 벌써 몇 번은 싸우고도 남았다. 


조부모의 서열은 부모 다음이다.


이럴 때 서열 2위로서 조부모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나이와 경험을 내세우며 서열 1위인 딸과 사위에게 호통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기침에 이게 좋다더라 저게 좋다더라, 그러게 내 뭐랬니 평소에 깨끗하게 치우고 살라 했지, 하며 근거 없는 정보와 쓸데없는 핀잔으로 정신 흔들어 놓는 게 아니다. 


조용조용 재빠르게 다니며 먹을 거 챙겨주고, 설거지며 빨래며 집안일에 신경 안 쓰이게 살펴주고, 아직은 제 형에게 감기를 옮지 않은, 안 아픈 작은놈이랑 놀아주는 것이다. 큰 손자가 빨리 병을 이겨내고 컨디션 회복하기를 바라는 것 밖에 할미로서는 달리 할 것이 없다. 


한 발짝 떨어져서 지켜보는 마음으로, 당황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으며 간호할 수 있는 여유는 내 자식이 아닌 손자가 아프기에 가능한 것이다. 아무렴, 할미 속이 썩은들 지 에미 애비만 하겄냐!



이전 10화 오늘이 바로 그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