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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랜턴 Mar 02. 2024

오늘이 바로 그날

최악의 날이 왔다.

딸이 다시 일을 나가기 시작하면서, 나의 황혼육아도 본격화되었다. 그에 앞서, 가장 피하고 싶은 최악의 상황을 떠올려봤었는데, 큰 손자가 감기로 열나고 아파서 유치원에도 못 가고, 작은놈은 제 형한테 옮아 콧물 찔찔 흘리고, 딸과 사위는 일하러 나가서 없고, 결벽쟁이 남편은 쓸고 닦는 일에만 열중이라, 결국 나 혼자 아픈 큰 손자와 어린 손자를 밥 먹이고 재우며 돌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큰 손자가 감기에 걸렸는지 주말부터 목소리가 가라앉고 기침을 하더니, 이젠 열까지 나서 결국 오늘 유치원에 못 갔다. 다행히 작은놈은 아직 괜찮으나 제 형에게서 병을 옮아오는 것은 시간문제다. 딸은, 엄마가 많이 힘들면 일찍 퇴근하고 올게, 말하지만 그건 프로라며 자뻑하는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깔끔한 남자, 남편에게 애 보기는 뒷전이다. 딸네 집에 들어서자마자 잔뜩 어질러놓은 집안 치운다며 청소기부터 집어 든다. 설거지통에는 아침 것인지 엊저녁 것인지 모를 그릇들이 쌓여있고, 기저귀 뭉치와 벗어놓은 아이들 옷, 장난감과 책들로 집안은 온통 아수라장이다. 사위는 벌써 출근했고, 나갈 준비 하느라 바쁜 딸은 내게 손자 먹일 기침약과 해열제를 설명하지만, 밤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이미 정신이 반쯤은 나가있다.


-운전 조심해!

출근하는 딸에게 아무렇지 않은 듯 덤덤하게 말하고 작은 손자를 넘겨받으면서 내 정신도 슬금슬금 나갈 채비를 한다. 그 와중에 울지도 않고 엄마도 잘 떨어지는 작은놈이 얼마나 기특하고 대견하던지.


큰 손자는 기침만 할 뿐 달리 보채지 않고 잘 논다. 헐크와 스파이더맨, 베놈과 함께 놀던 큰 손자가 작은놈을 재우고 나오는 나를 보더니 같이 싸움 놀이를 하잔다. 하! 아무리 아파도 어린놈 에너지는 당해낼 수 없다. 너랑 싸우는 놀이 했다간 내가 몸살이 날 것이고, 내가 몸살 나면 느이 집은 작살 난다, 아서라!


나는 부리나케 일어나 얼른 먹을 것을 대령하고, 이내 어린놈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슬쩍 돌려본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아까 보던 거~, 보물섬 이어서 볼까, 뭐 보고 싶어?

'보물섬~'

ㅋㅋ 넘어갔다. 설거지하고 점심 마련할 시간이 생겼다.


큰 손자 이마를 짚어보니 열이 난다. 해열제를 먹이고 낮잠을 재워보려 하지만 절대 안 잔다. 다시 지하로, 놀이방으로, 오르내리며 두 아이들과 놀아주었다. 남편은 위아래층 모두 청소하느라 점심도 겨우 먹었다. 아! 되다, 되!



그래도 시간은 흘러 어느새 4시가 됐다. 작은 손자가 오후 낮잠 잘 시간이다. 잠시 남편에게 큰 손자를 맡기고, 작은놈을 재우러 방으로 간다. 유축해 놓은 모유를 한 통 다 비운 작은 손자는, 눈이 말똥말똥 잘 생각이 없다. 방긋방긋 웃으며 내 손을 잡고 걸어 다니겠단다. 니들 오늘 왜 이러냐! 제발 잠 좀 자라 말이야!

할 수 없이 작은놈을 데리고 방을 나왔다. 4시 반이 넘었는데....... 사위 놈이 퇴근하고 올 시간인데 왜 아직 안 오지? 조금만 더 버티자, 5시엔 딸도 온다.


5시 10분. 딸도 사위도 아직 안 왔다. 큰 손자가 나를 데리고 지하로 내려간다. 나는 작은놈을 데리고 끌려간다. 조금 있으니 사위가 돌아오고, 또 조금 더 지나 딸도 퇴근했다. 아침에 나가면서, 오늘 저녁 메뉴는 버터 치킨이라 했는데, 메뉴만 알려줬지 준비된 것은 하나도 없다. 손자들을 딸과 사위에게 넘기고 마지막 남은 한 방울의 힘을 짜내 닭을 씻고 볶고, 브로콜리를 씻고 삶고, 소스를 섞어 저녁을 차렸다.

 

-큰 애가 열은 이제 없지만 아직 기침을 많이 하니까 내일도 학교 보내지 말고 집에서 쉬게 해.'

'그럼 엄마 아빠가 내일 아침에도 일찍 와야 되고 너무 힘들 텐데'하며 딸이 걱정한다.

-괜찮아, 아직 아픈데 학교 보내면 애가 힘들잖아. 하루 더 쉬게 해.'

내가 지금 뭔 말을 하고 있냐! 정신 챙겨라잉~


'잘 먹었습니다~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사위가 나선다. 역시 착한 우리 둘째 사위~

딸은 아이들에게 밥을 마저 먹이고, 남편은 식후 끽연하러 나가고, 나는 뒷정리를 하면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물병과 커피잔들을 챙겨 설거지통에 넣어준다.

-설거지가 좀 많지.' 집에 갈 시간이 다가오니 나는 제법 상냥한 척이다.

'거의 다 했어요, 허허.'


그렇게 퇴근을 하고 집에 왔다. 조금 지나 딸에게서 문자가 들어온다.

'둘째가 큰 애한테 감기 옮아서 콧물이 나와.'


악! 드디어 최악의 상황이 왔구나!

오늘이 그날이 아니라 내일이 바로 그날이네! 아~ 일찍 자자! 오늘 잘 자야 된다!

불 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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