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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랜턴 Mar 06. 2024

생일 케이크와 양초

세련된 궁상 DNA

생일 케이크에는 항상 나이 수만큼의 양초를 꽂는다. 아이가 셋인 나는 남편까지 해서 일 년에 다섯 번 생일 축하를 해야 했는데, 생일 축가를 부르고 나면 바로 버려지는 초가 아까웠다.


한국에서는 케이크를 사면 나이 수만큼의 초와 성냥개비 하나를 당연히 끼워주는데, 이놈의 캐나다는 케이크 따로 초 따로 라이터 따로, 다 따로따로 사야 된다. 싸지도 않다. 그래서 축가를 다 부르고 난 후에도 심지만 까맣게 타고 멀쩡하게 남아있는 초를 따로 보관했다가 다음 누군가의 생일 축하에 또 쓰곤 했다.

 

촛불이 없는 케이크는 의미 없는 빵 덩어리일 뿐이다. 케이크에 초는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반드시 새것이라야 할 이유는 없다는 생각과, 축하 노래 몇 곡 더 불러도 될 만큼 충분한 양이 아직 남아있는데 함부로 버리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렇게 돌려가며 다섯 번 쓰고 나면 1년 치의 생일 축하도 끝이 났고, 초도 거의 반 토막이 되어 미련 없이 쓰레기통으로 던져졌다.



 

사춘기를 맞은 딸들은 엄마의 그런 궁상이 싫었나 보다. 썼던 초를 다시 쓰냐며 입이 댓 발 나오곤 했는데, 특히 지금 내가 손자 육아를 도와주고 있는 둘째 딸은 구질구질한 옹색함에 매우 예민했다.


학교를 졸업한 둘째가 취업을 하고 돈을 벌기 시작할 때까지 나의 양초 돌려쓰기는 계속되었지만, 반대로 둘째가 해주는 내 생일선물은 급격하게 업그레이드되었다. 어린 시절의 궁색함을 돈으로 풀고 싶었던 건지, 늘 추레했던 엄마를 위해 고급진 무엇 하나를 사주고 싶었던 건지 딸의 속마음을 모르겠지만 나는 받으면서 좋았다.


그 딸이 결혼을 하고 제 살림을 할 때도 내 생일선물은 그런대로 고급졌었다.

'이제 애 태어나면 이렇게 못해, 해줄 때 받어.'

해준 것도 없는 내가 비싼 선물을 받는 것이 미안한 마음이 들어, 선물 안 해도 돼, 하면 딸은 늘 그렇게 말했다. 불과 3년 전까지는.  


그러던 것이 첫 손자가 생기고 둘째가 태어나면서 육아비용은 하늘로 솟구쳤고 내 선물의 급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이제는 잊지 않고 챙기는 것만도 고마울 지경이다. 사실 촛불 얹은 케이크 하나여도 나는 괜찮았다.

 


지난해 큰 손자가 네 살 되던 생일날, 나는 봤다.

딸이 서랍을 열고 썼던 초를 꺼내 손자의 생일 케이크에 꼽는 것을.


생일축가를 부르고 나서 촛불을 끄고 케이크를 자르기 위해 초를 뽑아냈다. 딸이, 꺼낸 초를 크리넥스 한 장에 잘 모아둔다. 케이크를 나눠먹고, 사진을 찍고, 웃고 떠들며 축하가 끝났다. 각자 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정리를 하고 있는데, 나는 또 봤다.

식탁 한쪽 편에서 딸이, 양초에 묻어있는 생크림을 열심히 닦고 있는 것을.


또 쓰게? 

딸이 멋쩍게 웃으며 대답한다. '아까워.'


몹쓸 놈의 궁상 DNA. 나 때에 비하면 훨씬 여유롭게 사는 네가 왜!

하긴, 나 때보다 초도 더 굵고 예뻐진 것이 업그레이드가 되긴 했다. 딸은 아예 숫자 모양으로 만들어진 초를 0부터 9까지 한 세트로 사서 쓰고, 쓰고, 또 쓰고 있다. 몹쓸 놈의 궁상 DNA가 세련되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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