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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랜턴 Mar 16. 2024

할아버지의 육아법

육아와 육아의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기

또다시 감기에 걸린 큰 손자는 이번 주 내내 학교에 가지 못했다. 놀이방을 다니기 시작한 둘째 손자는 선생님이 아프다는 이유로 5일째 집에서 놀고 있다. 지난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딸도 몸살이 나서, 딸까지 간병하느라 정신이 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남편에겐 여전히 청소와 정리 정돈이 일 순위다. 본인이 원하는 주변 상태가 되고 나서야 육아를 거드는데, 그 조차도 가관이다.


혼자서 밥 먹는 걸 힘들어하는 큰 손자를 보며 밥 먹는 것 좀 도와주라 했더니 손자 옆에 앉은 남편,

김 한 장 날름 입에 넣고, 소시지 한 조각 우물거리며 본인이 밥을 먹는다.

분명히 방금 전에 점심을 먹었는데, 그건 간식이었나?


손자 둘을 동시에 놀아주기가 힘들어 큰 놈 데리고 놀아주라 했더니, 어린것 앞에서 남편이 개그를 한다.

'롱 롱 어고우, 타잔 앤 타잔스 와이프 리브 인 더 정글. 매니 매니 애니머얼~, 포 이그잼플~'

어이구! 네살배기한테 19금 야설을 풀려고 하다니, 중간에 안 말렸으면 끝까지 갔을 거다.


큰 놈은 화장실에서 똥 닦아달라며 소리를 지르고, 똥 기저귀 바꾸려고 눕혀놓은 둘째 놈은 누워있기 싫다며 발딱발딱 일어나는데, 점심을 먹고 나서 식곤증이 오는 남편은 소파 지정석에 앉아 눈만 꿈벅거린다. 졸음을 부르는 건지, 눈뜬 채로 졸고 있는 건지. 여하간 나와는 딴 세상이다.


Photo by Jschley @ Pixabay


어느덧 4시가 넘어 딸과 사위가 퇴근할 즈음이면 남편은 비로소 생기가 난다. 물어보진 않았지만 아마도 맛있는 저녁밥 먹을 시간이 다가오고, 또 저녁을 먹고 나면 우리도 퇴근할 수 있어서겠지. 그 느낌이 대충 짐작은 간다만...


자기를 잡아보라며 뛰어가는 큰 손자를 남편이 괴성을 지르며 쫓아다니는데, 손자 놈보다 더 신이 났다.

'으어허헉~, 이야얖핲, 으그큭컥헛!'

손자 놈은 재미있다며 캭깔깔 웃다가, 으크큭끼야~ 하고 도망가며 소리 지르니 당최 시끄러워서, 찌개에 소금을 넣을지 간장을 넣을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마침내 퇴근한 딸과 사위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들어오면 손자 놈들은 그때부터 날 아는 척도 안 한다.

오냐 좋다. 나도 땡큐다 이놈들아!

얼른 저녁 차려서 먹고 설거지하고 있으면, 남편은 어느새 차에 시동 걸어놓고 집에 갈 준비를 하고 있다. 씻고 나온 손자들에게 바이 바이, 굿 나잇~ 대충 손 흔들고 남편과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집으로 향한다. 남편이 운전하는 차 안에 앉아  집 나간 정신을 겨우 수습한 나도 잠시나마 단잠에 빠져든다.


손자를 육아하는 건지 자신을 육아하는 건지, 내 보기에 형편없는 자기 주도식 육아법이지만 그렇게 하루를 보낸 남편도 고단하기는 마찬가지인가 보다. 집에 오면 나보다 먼저 곯아떨어지고, 그르렁거리는 숨소리는 늙어 힘 빠진 짐승의 것마냥 가련하기 짝이 없다. 그것을 보며 나는 또 속없이 안타까운 마음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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