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우리의 삶이 대견하다.

by 블루랜턴

시간이 지나야지만 알아지는 것들이 있다. 우리의 삶이 그렇다. 부부라는 것도 그렇다.

결혼 37년 차.

요즘에서야 남편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비혼을 마음먹었던 내가 25살에 결혼하고 이듬해에 딸을 낳고, 그 이듬해에 또 딸을 낳고, 6개월 뒤 대학을 졸업했다. 비혼의 이유는 아버지같이 자신만 아는 남자를 만날 까봐서였고, 결혼의 이유는 늦게 들어간 대학교에 낼 등록금이 없어서였다. 혼자 살기 위해 대학에 들어갔는데, 졸업을 하기 위해 결혼을 해야 했다.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 고깃집 알바에서 처음 만난 남편의 첫인상은 차가웠다. 자신의 성향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듯, 나의 일그러진 결혼생활은 그러고 보면 나쁜 남자 스타일의 차도남에게 끌렸던 나의 성향 탓일 수도 있다.


겉은 차가우나 속은 따뜻했던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과는 달리, 남편은 놀기 좋아하고 이기적이며 속까지 차가운, 내 아버지와 똑같은 남자였다. 쩌렁쩌렁한 시어머니의 존재마저 내 엄마의 인생과 똑 닮은, 완벽한 조합이었다.


겨울에 만나서 여름에, 그렇게 순식간에 결혼했다. 다행히 결혼 축의금으로 2학년 2학기 등록금을 낼 수 있었다.




결혼 후엔 다 그렇게 사는 줄 알고 살았다.

남편은, 아빠는, 집보다 밖에 있는 시간이 더 많고, 어린 자식들보다 제 친구들과 더 시간을 보내고, 아껴놓은 생활비를 톡 털어가도 아내는, 집에서 아이들을 지키고, 가까웠던 친구들을 하나씩 떨궈 내고, 맥없이 내주며 사는 건 줄 알았다. 십 년이 그렇게 지나갔다.


당장 등록금이 없다는 이유가 가장 크긴 했지만 사랑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다만 그 사랑에 확신이 함께 있지 않았다. 지금처럼 알바가 흔했던 시절이 아니었고, 머리보다 운이 좋아 들어간 대학인데 장학금까지 바란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1학년 내내 나는 하루종일 등록금 걱정만 하고 다녔다. 가난한 친정에서 등록금이 나올 리는 만무했으며, 애초부터 그런 기대도 없었다. 1학년은 알바로 해결했지만 남아있는 3년 간의 등록금이 주는 압박감과, 늪 같은 친정에서 빨리 헤어 나오고 싶은 마음이 더해져 이 사랑에 대한 검증기간을 싹둑 잘라먹었다. 그리하여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어느 냉장고 광고 카피를 절절하게 실감하며 보낸 시간이었다.




몇 년 뒤, 부자라고 떵떵거리던 시댁이 망했다. 호랑이 같던 시어머니는 사업실패로 인해 화병으로 돌아가셨고, 시댁의 형제자매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철의 여왕 같던 어머니를 잃은 남편은 비로소 철이 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다시 제로에서 출발했고, 5년 뒤 캐나다로 건너오면서 남편은 기러기 아빠가 되었다.


캐나다에 와서 사는 24년 동안 남편과 내가 같이 보낸 시간은 모두 합해서 6-7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남편이 퇴직한 후에서야 쌓인 것이다. 그러니 37년이라고 해봐야 같이 살아온 시간은 절반을 겨우 넘는다.


연애기간이 짧았던 우리 부부는 결혼해서도 한동안 서먹서먹했다. 부부가 내외하듯 말을 가려서 했고, 내 속마음을 모르는 남편은 시어머니에게, 나는 친구에게 털어놓으며 각자 한숨을 쉬곤 했다. 결혼 햇수로 20년이 지나도 우리는 상대의 표정을 읽어내지 못했다. 오히려 퇴직 후에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삐그덕하던 것이 맞춰지고, 말수가 적어지면 화가 난 것임을 알아챈다. 와중에 별거 시도도 있었고 이혼 위기도 있었지만, 그러면서 적당히 소금기가 빠지고 서로에게 스며들고 있다.


뒤돌아보면 위기를 잘 넘겨온 우리의 삶이, 남편과 내가 고맙고 대견하다.


다 늙은 부부의 사는 모습이 뭔 재미가 있을까마는 나이를 먹으며 알아지고 이해되는 차도남의 반전매력이, 요즘 나의 일상에 아이스크림 같은 차가운 달콤함을 선물하고 있다. 그 이야기를 써 볼 생각이다.


남편의 뒷모습은 왜 그렇게 짠해 보이는지,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짠했던 것인지 생각 중이다. 오래 살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