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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랜턴 Apr 09. 2024

스키장에서 외박하고 온 남편

내가 문을 열어주나 봐라!

등록금 때문에 서둘러 결혼했지만 남편이 내 등록금을 내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하긴, 시집오면 학비를 대주겠노라 말한 사람은 시어머니였지 남편이 약속한 건 아니다. 프리랜서 남편의 수입은 일정하지 않았고, 그나마 6개월 일을 하면 6개월은 놀았다. 본인의 용돈을 벌기도 빠듯한데 어딜 내 등록금까지 감당하랴, 애초부터 남편에겐 그럴 능력도, 의향도 없었다. 시어머니는 내가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과 용돈, 교통비는 물론이고 어떤 때는 내 도시락까지 싸주셨으니 명실공히 나의 학부모님이었다.


졸업 후 시어머니의 도움으로 동네에 작은 약국을 개업했다. 그리고 우리는 독립했다. 남편의 수입은 내가 관리했으며, 이제부터 용돈도 내게서 받아갔다. 약국은 일요일만 빼고 매일 아침 9시에 문을 열었고, 밤 10시에 문을 닫았다. 하루에 13시간씩 일했다.




어느 겨울, 용평 스키장으로 일하러 간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일은 끝났지만 야간 스키장이 오픈했으니 여기 온 김에 오늘 밤과 내일 낮까지 스키를 타고 저녁쯤 집에 돌아오겠다는, 그러니까 노느라 하루를 외박하겠다는 어처구니없고 맹랑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다. 뭐라고! 나 혼자 애 둘을 먹이고, 씻기고, 재우라고! 약국에서 하루종일 일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뭐, 온 김에 스키 좀 타고 오겠다고!  

내가 문을 열어주나 봐라! 


나는 정말 착하고 순수하고 순종적인 여자였다. 그때만 해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일을 수도 없이 겪으면서 나는 점점 각박하고, 팍팍하고, 틱틱거리는 악처가 되어갔다.


하루를 외박한 남편이 다음 날 밤 아이들이 다 잠든 후에 현관문을 두드렸다. 자기야~ 자기야, 문 열어, 나 왔어~

  

문 안 열어 줄 거니까, 스키장으로 다시 가든지 여관에 가서 자든지 알아서 해요!


한 동안 나를 부르며 문을 두드리던 남편이 조용해졌다. 흥, 시끄럽게 하면 내가 뭐 옆 집에 창피해서 얼른 열어줄 줄 알았나 보지, 어림없다! 그때는 지금처럼 세련된 도어록이 아니어서 안에서 열어줘야 했다.


한참이 지났는데 다시 열어달라는 소리가 없다. 이 사람이! 정말 여관에라도 갔나? 그러기만 해 봐, 그러면 이제 아주 끝내는 거야! 문을 열고 살금살금 밖으로 나가봤다. 어두운 빌라 복도에 아무도 없다. 1층으로 내려가 남편의 차가 있는 것을 확인한다. 어라! 차가 있네, 어디 간 거지?

순간 반가움과 멀리 안 가서 다행이라는, 지가 가봐야 거기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남편은 차 안에서 몸을 구긴 채로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이 또 짠해 보여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서 자요, 할 뻔했다. 그래, 오늘은 거기서 자라! 죄를 지은 자 벌을 받아야 마땅하지!


남편이 집에 왔으므로 나는 이제 방에 들어가 마음 놓고 자도 되었다.



상단 이미지: Pixabay로부터 입수된 Scros님의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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