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는 알지 못했던 것
2016년 5월, 13년을 함께 한 자식 같은 고양이를 보냈다. 그리고 그 이듬해 8월, 엄마는 울면서 돌아가셨다. 임종을 지키지 못한 자책과 괴로움, 연이은 슬픔으로 뒤엉켜, 나는 살고자 하는 의욕을 잃었다. 가슴을 꽉 메운 상실감과 회한으로 거의 하루 종일 멍한 상태였다.
남편은 나의 이런 마음을 살피는 대신, 위로하러 오는 조문객의 마음을 더 챙겼다.
'이제 그만큼 했으면 됐어. 기운 내고, 동생이랑 매제가 온다는데 같이 근처 레스토랑에 가서 밥이라도 먹여 보내야지.'
나는 꾸역꾸역 옷을 입고 나가서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밥을 삼키며 인사치레를 해야 했다. 한국에서 엄마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지 열흘도 안 지났을 때였다. 엄마를 그렇게 보내고 살아간다는 것이 미안해서 먹는 것은 물론 말을 하는 것도 싫었고, 아침에 눈이 떠지는 것조차도, 그 무엇도 반갑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은연중에 슬금슬금 다가오는, 확실한 노후대책도 없이 맞아야 하는 불안한 나의 60대가 무서웠다. 살 의욕이 없다 해서 억지로 죽을 수도 없지만, 더 산다고 해서 더 좋은 꼴을 볼 것도 아니었다.
맨땅에 헤딩으로 일궈낸 사업도 더 이상 끌고 갈 힘을 잃었고, 코로나 사태까지 더해져 거의 개점휴업 상태가 되었다. 남편은 뭐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보다 한국의 어지러운 정치에 관심이 더 많았고, 대통령이 탄핵이 되느냐 마느냐 하며 하루 종일 뉴스와 유튜브를 돌아다녔다.
나의 스트레스가 최대치를 찍었나 보다. 감기 몸살이 몇 년에 한 번 걸릴 정도로 잔병이 없었던 나는, 나의 건강 상태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즈음 많이 피곤했고, 기운도 없고, 아침 기상이 힘들었다.
2019년 9월, 나를 위로하기 위해 혼자 스페인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처음 가보는 낯선 나라!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난생처음 나 홀로 여행을 한 후 내 마음은 조금씩 추슬러졌고, 밝아졌고, 강건해졌다. 미래에 대한 불안도 줄어들었다. 돈이야 벌면 되지, 이대로 굶기야 하겠는가! 남편에겐 여전히 서운했지만, 일부러 나쁘게 하는 악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과, 내 눈치를 자주 살피는 남편이 측은해 보였다.
가정 주치의를 정하면서 종합 검사를 받았고, 갑상선 기능 저하증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그럴 리가 없다며 의사에게 화를 냈지만, 분명히 변비 증세가 있었고, 피곤했고, 먹지 않는데도 체중이 줄지 않았다.
호르몬 기능에 이상이 생기는 것은 스트레스가 주원인이다.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면역기능도 떨어졌다.
나는 그때부터 매일매일 갑상선 약을 빠짐없이 챙겨 먹어야 했고, 3개월마다 혈액검사를 받아야 했다. 나에게 이런 골치 아픈 병을 가져다준 사람은 남편이라는 생각이 들며, 다시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내가 눈치를 못 채는 사이 남편도 늙어가고 있었다.
혼자 한국에 나가 돈을 벌고 있을 때, 내게 한 푼이라도 더 보내기 위해 아끼고 안 쓰고 안 먹으며 버틴 십여 년 동안 건강도 나빠졌고, 인간관계도 허물어졌다. 업무 스트레스로 담배는 더 피워댔고, 영양을 무시한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것에 만족했다. 식단을 관리해 주는 사람도 없었고, 본인도 조절을 하지 못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던가! 부잣집 아들로 자란 사람이 지금은 나보다 더 궁상이다.
남편이 당뇨약을 먹은 지는 올해로 12년째다. 본인이 당뇨에 걸렸다고 가족을 탓하거나 나를 원망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이민으로 온 캐나다에서 일을 하지 않았던 건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언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란 걸 나중에 알았다. 나의 슬픔을 헤아리지 못했던 건, 마음 헤아리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작년에는 알지 못했던 것을 또 한 해를 살며 나는 알아간다.
살아내느라고 얻은 병, 늙어지는 몸뚱어리를 누구에게 탓할까! 우리가 서로 이해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 세월을 보상받을까! 남편의 엄마도 돌아가셨고, 나의 엄마도 안 계시다. 엄마 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해 주지 않으면 누구에게 그 사랑을 받을까!
병자들끼리 서로 의지하고 위로하며, 오순도순 늙어갈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