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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랜턴 Jun 28. 2024

좋은 남편은 좋은 아들이 될 수 있는가

노인 장수시대, 진정한 효도란?

손자가 수족구에 걸려 3일 동안 심하게 앓았던 지난 5월 말, 딸과 사위가 투닥거리며 싸웠다. 급기야 딸은 가방을 꾸려 집을 나왔고, 울면서 하룻밤 재워달라며 내게로 왔다. 결혼 후 처음 있는 일이다.

 

얘기를 들어보니, 사위가 사돈어른을 모시고 일주일 여행한다는 것에서 말다툼이 비롯되었다고 한다. 사위는 아버지가 와계신 김에 좋은 곳 보여드리고 맛있는 것도 사드리는 좋은 아들이고 싶었다. 반면에 딸은, 일주일 동안 남편 없이 혼자 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씻기고 재우고 하는 일이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왔나 보다. 제 아내 힘든 건 생각 안 하고 제 부모만 챙기려는 남편이 야속했단다.


동시에 그동안 묻혀 있었던 자잘한 일들까지 도드라지면서 둘의 감정이 결국 뒤틀어지고 말았다. 애들이 아파서 예민한 중에 연로한 아버지가 와 계시니 아들로서 며느리로서 더 신경 쓰였을 것이다. 사돈어른이 여행을 시켜달라고 요구한 건 아니었지만, 집에서 하루종일 무료하게 지내는 아버지를 보는 아들은 아버지가 짠해 보일 수밖에 없다.


부부싸움은 부부 당사자 간의 문제로 다투는 경우가 많다. 반면, 부부 사이는 좋은데, 양가 부모로 인해서 둘의 관계가 틀어지고 위협을 받는 경우도 아주 흔하다. 어쨌거나 딸의 울음을 보는 친정 엄마인 내 속은 편치 않았다.

 



진정한 효도란 무엇일까?

부모에게 용돈을 많이 주는 것?

부모의 생일과 기념일들을 기억하고 선물이나 축하금을 보내는 것?

좋은 차를 사주고 여행을 보내주는 것?

주말마다 부모 집에 가서 음식을 나누고 담소하는 것?(아픈 부모를 돌보는 것은 제외한다.)


아니, 요즘 시대에 효도라는 개념이 건재하기는 하나?

  

나의 개인적인 소견으로 진정한 효도란, 자녀가 독립된 존재로 자기 인생을 잘 살아가는 것이다. 

잘 산다는 의미는 세상이 부여한 물질적인 풍요와는 다르다. 또한, 결혼의 유무와도 관계없다. 곧, 부모가 다 큰 자식 때문에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되고, 부모가 다 큰 자녀에게 돈이나 노동을 제공하지 않아도 되는, 독립적이고 성숙한 가정을 꾸리며 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효도라고 생각한다.


© shutter_hunter, 출처 Unsplash


사위는,

부부가 서로 조금씩 양보한다면 좋은 남편이면서, 동시에 좋은 아들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지극히 이상적이다.


부부 공동체의 가정에서 개인의 이상적 욕심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상대 배우자의 적극적인 도움과 배려가 단연코 필요하다. 그것이 없다면 암묵적으로 강요당한 희생이라도 깔려 있어야 한다. 딸은 사위가 좋은 아들이기보다는 좋은 남편이기를 바랬다. 당연하다.


가정을 기본 단위로 하여 우선되어야 할 것은 좋은 아들보다는 좋은 남편이다. 그것이 제 가정을 지키는 일이고, 결국 부모에게 효도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자식이 제 가정에 충실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부모가 '자식 키워봐야 소용없다'는 식의 잘못된 보상심리나 저항을 가져서는 안 될 것이다. 자녀는 독립했는데, 부모가 독립을 못하고 있다면 어불성설이지 않은가.


그러기 위해서는 자식과의 거리가 조금은 멀어질 필요가 있다. 


독립한 자식들은 고맙게도 제 가정을 이루고 지키기에 분주하다. 제 아이들 키우고 사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하루는 숨이 차며, 저들 또한 자녀를 독립된 가정으로 일궈내기까지 앞으로 가야 할 여정이 멀고도 험하다. 이것을 스스로 잘 해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효도가 아닐까?


부모의 가정은 부모의 의무와 책임이며, 자녀의 가정은 자녀의 것이어야 한다. 각각은 독립적인 단위다. 필요 이상의 감정으로 서로 엮이거나 누가 누구에 의해 휘둘릴 이유가 없으며, 그래서도 안된다는 생각이다. 자녀들이 진정한 효도를 할 수 있도록 그들의 독립성을 존중하고, 동시에 나의 독립성을 지켜내는 것이 건강한 노인 장수시대를 사는 우리 부모들의 역할이라고 본다. 이것을 '가족의 해체' 또는, '가족의 의미'의 축소라고 표현하는 것은 꼰대적 발상이다.


그러니 특별히 어느 쪽이 무거운 병 중에 있지 않는 한, 부모 자식이 전화는 한 달에 서너 번이요, 얼굴 보기는 일 년에 한두 번이면 딱 좋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너무 정이 없고 삭막한가?




대문 사진 출처: © mbennettphoto,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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