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살 배기의 수박사랑
큰 손자는 네 살이 지나면서부터 장난감을 사 달라 해피밀을 사 달라, 요구가 부쩍 늘었다.
남편은 아예 '할아버지 돈 없어!' 딱 잘라 말했고, 이에 당황한 손자가 슬며시 나를 쳐다봤다. 어린것의 참담한 표정에 더욱 당황한 나는, '할머니 돈 있어, 할머니가 사줄게!' 했더니 그 후로는 내게만 뭐를 사달라고 한다. 품목은 주로 먹는 거다.
어느새 바깥 음식을 요구할 만큼 성장한 손자가 귀엽기도 하고 밥을 잘 먹지 않으니 안쓰럽기도 해서 사주게 되는데, 그런 걸 사주니까 밥을 더 안 먹는다며 딸이 뭐라 한다. 내 돈 쓰며 밥 사주고 욕먹고... 내게도 남는 장사는 아니지만 해피한 손자 얼굴을 보면 나도 해피해지므로 가끔 잊은 척 눈 딱 감고 사주게 된다.
지난 3월 중순, 여름 수박이 나오기도 전의 일이다.
며칠 전부터 손자가 수박을 사달라기에 언제 사 오마 약속을 했으니 안 지킬 수도 없었다. 하여 그날은 딸네 가는 길에 마트에 들렀다. 이래서 할머니들 쌈짓돈이 다 털리는구나, 하면서도 작은 입으로 맛있게 먹는 모습을 상상하며 미니 수박 하나를 사 왔다. 가격이 무려 $5.99, 한화로 약 6천 원이다.
드디어 손자가 유치원을 마치고 집에 왔다.
수박을 자르는 동안 남편은 옆에서 침을 질질 흘리고 있고, 손자는 빨리 먹겠다며 발을 동동 구른다.
수박 킬러 DNA가 남편과 딸을 거쳐 손자에게까지 대물림됐나 보다.
한 접시 먹고, 또 한 접시 먹고, 아무리 미니 수박이라지만 네 살배기 손자 혼자서 수박 반 통을 금세 먹어치웠다. 제 철이 아니라서 어떨까 싶었는데 여름 수박만큼이나 맛있긴 하다.
손자 때문에 맥도널드에서 장난감으로 할까 책으로 할까 고민하며 해피밀도 시켜보고, 난생처음 겨울에 여름 수박도 먹어본다.
약국에서 일할 때는 할머니들이, '하나만 사! 이번이 마지막이야!' 하며 손주들에게 장난감 사주는 광경을 보곤 했는데... 그때는, 저런 건 따끔하게 말해야지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라고, 하며 혀를 끌끌 찼었는데...
이제는 사 줄 수도 안 사줄 수도 없는 할머니들의 딜레마가 이해된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더니,
이 나이에는 이런 선택을 하는구나!
역시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말할 수 없다.
어쨌든 손자 덕에 올해 수박 맛이 어떤지 비싼 경험을 이렇게나 일찍 해봤다.
달달하니 맛이 꽤 괜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