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의 나를 위로한다.
중학교 때부터 돈 벌 궁리를 하던 나는 어느 해 여름 교과서와 참고서를 챙겨 헌 책방으로 들고 갔다. 아마 맘씨 좋은 책방 사장님이었나 보다. 교과서는 종이값 밖에 안된다면서도 한 권도 되물리지 않고 무게를 달아서 모두 사주셨다.
고작해야 몇 천 원이었을 돈을 들고 기쁜 마음으로 달려와 엄마에게 드렸고, 썼던 것을 돈으로 바꾸는 것에 한 번 맛 들인 나는 해마다 책을 팔았다. 처음 한두 번은 자랑스럽게, 그다음부터는 궁색하게.
중학생 신분으로 달리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당연히 내다 팔 것들을 생각했고, 마침 갖고 있는 것이 학년 바뀐 교과서와 몇 안 되는 참고서였다. 책 판 돈은 1,2천 원에 지나지 않았을 테지만, 그 돈으로 우리 가족은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었다.
아끼던 영어 참고서 메들리 삼위일체를 팔았던 걸 보면 고등학교 때까지 이어졌었나 보다.
고등학생 시절 어느 해, 한 꾸러미의 책을 들고 시장 입구에 있던 그 책방을 다시 들렀는데 사장님은 이젠 안 사겠다며 그냥 가져가라 했다. 그때는 종이값도 떨어져서 헌 책을 사는 책방 사장님에게도, 팔려는 나에게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을 거였지만, 나의 실망감은 매우 컸다. 집으로 가져가는 책은 올 때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고, 책을 동여맨 가느다란 노끈은 손바닥과 연결된 나의 가슴에 붉은 자국을 새기며 쓰라린 기억을 남겼다.
책방 사장님은 메들리 삼위일체 하나만 샀다. 매일 아침 1시간씩 보며 세 번을 읽은 책이다. 그때도 학년이 끝나고 팔아먹을 책들을 둘러본 나는, 그나마 돈 되는 책이라곤 그거 하나밖에 없다는 생각에 큰 맘먹고 들고 갔었다. 막상 싼 값에 팔려나가니 무언가를 잃은 것처럼 허전함이 쿵 내려앉았다. 나머지 책꾸러미를 들고 집에 돌아오는 길은 걷는 내내 매미가 알맹이를 날려 보낸 것처럼 헛헛하기만 했다.
그 이후 내 책을 팔지 않았다. 학교를 다 마쳤으니 더 이상 팔 책도 없었고, 교과서 말고는 사실 팔아먹을 책도 없었다.
그리고 헌 책방도 점점 줄어들었다.
다시 헌 책방에 들른 것은 결혼하고 큰 아이를 낳고 나서였다. 학교를 다니면서 출산한 내가 육아 도움을 청할 곳은 엄마밖에 없었다. 엄마는 내가 졸업할 때까지 거의 2년을 나와 함께 살았다.
손주 돌보느라 고생하는 엄마에게 옷을 사드린다며 들린 곳이 어쩌다 보니 청계천 상가였다. 헌 책방으로 유명했던 청계천 거리에도 헌 책방은 겨우 몇 군데만 남아 있었다.
길거리 난전에 걸린 꽃무늬 투피스 한 벌을 엄마에게 사드리면서 흘깃 옆의 책방을 둘러보았다. 문은 열려있지만 좁고 남루했으며, 뒤로 길게 뻗어있는 안쪽에서는 눅눅한 종이책 냄새가 풍겼다. 책을 팔던 추억들이 퀴퀴한 냄새와 함께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나는 아주 잠깐 상념에 젖었었는데, 메들리 삼위일체가 있는지 한 번 물어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궁색하고 초라한 헌 책방의 모습이 옛날의 나를 재현한 것 같아서 하마터면 눈물이 나올 뻔했다.
캐나다에 사는 동안 한국의 헌 책방은 잊고 살았다. 몇 년 후 대형 중고 서점 알라딘이 생겼다는 말을 들었으나, 알라딘은 내가 알고 있는 옛날 헌 책방의 모습이 아니었다.
서울 변두리 어느 동네, 버스를 타고 헌 책방을 지나간 적이 있다. 아직 있구나! 반갑고 고마웠다. 초라했지만, 나의 그 시절을 다시 보는 것 같아 반가웠고, 낡은 대로 살아있어서 고마웠다. 헌 책방도, 겨우 살아냈어요, 하는 듯 힘겨워 보였다.
한국에 갈 때마다 광화문 교보문고에 간다. 새 책의 베일 듯한 날카로움과 신선한 잉크냄새의 스릴이 둔해질 때쯤 마음에 걸리는 한두 권을 집어든다. 동시에 헌 책들이 잘 분류되고 정리되어 있는 알라딘에 들러 유행 지난 책도 몇 권씩 사들고 온다.
나처럼 돈 때문이건, 미니멀리즘을 위한 정리가 목적이건 누군가 팔았을 헌 책을 사며 옛날 옹색하게 책을 팔던 나를 위로한다. 번쩍이는 세련미나 기계의 차가움이 만져지는 새 책과 달리, 헌 책에서는 그윽하고 두터운 삶의 냄새가 난다. 헌 책의 제목들조차 그렇다.
대문 사진 출처: © elifrancis, 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