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차 기획자의 고백, 약 빨고 글 씁니다.

by 부루마불

에듀테크 회사에 다니는 나는 대중을 상대로 글을 쓴다. 자사의 상품을 더 잘 팔기 위한, 즉 자사의 콘텐츠를 홍보하는 카피 쓰는 일을 한다. 통상적으로 기획안으로 글쓰기의 흐름을 구상한 뒤, 스토리보드를 통해 카피로 풀어낸다.


중견기업임에도 불구하고 스타트업 문화가 남아있는 우리 회사의 경우, 다른 스타트업과 마찬가지로 업무강도가 강한 편이다. 오늘까지 기획안을 그려오라든지, 이것은 내일까지, 저것은 또 언제까지 등 촉박한 일정만이 주어진다.


이런 빡센 업무강도 앞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바로 ‘약 빨고 글쓰기’이다. 한 번에 혹은 최대한 빠르게 컨펌받기 위해서 약 빨기 작업은 불가피하다. 온전한 ‘나’라는 화자랑 ‘회사’라는 화자는 다르기 때문에, 나를 회사의 페르소나로 설정하는 작업을 나는 ‘약 빤다’라고 지칭한다. 즉 나에게 회사의 페르소나를 덧씌우는 것인데, 나와는 180도 상반된 톤앤매너를 사용하기에 나는 약 빤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약 빨기 장착 모드로 돌입하면 나는 내가 아닌 사람을 연기라도 하듯, 카피를 후루룩 후루룩 써내곤 한다. 분명 내가 쓰고 있는 글이지만 내가 쓴 글이 아닌 것처럼 글을 쓴다. 이때 의외의 발견을 하곤 하는데, 이렇게 약 빨고 글을 쓰다 보면 재미있을 때가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나와 다른 성격의 화자가 또 다른 내가 된 느낌으로, 새로운 경험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마치 연기자가 자신이 연기하는 드라마 캐릭터가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듯이 말이다.


이렇듯 나는 회사의 업무강도를 견디기 위해서 나에게 또 다른 나를 덧씌우는 작업을 일상적으로 한다. 인생을 살다 보면 간혹 일이 잘 안 풀린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땐 약을 빨고 내가 아닌 내가 되어보면 어떨까? 약 빨고 중대한 결정 내리기, 약 빨고 운동하기, 약 빨고 새로운 사람 만나보기 등 살아남기 위해, 버티기 위해 내가 아닌 내가 되어 무언가를 해보는 것이다.


약 빨고 다른 내가 되어 살아 보는 것. 이런 경험들이 모여 또 다른 나를 발견할 수도, 또 다른 내가 형성되기도 하는 경험이 될 것이라 믿는다. 어쩌면 ‘약 빨기’는 견디기를 넘어 나를 발견할 수 있는 재밌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2021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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