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겨우 출발했어요.
공부했던 환경 분야 쪽으로 진로를 바꾸려면 어느 곳을 여행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이 많았다. 짧은 여행을 계획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려해야 할 요소들이 몇 가지 있었다.
1. 예산이 많이 들지 않는 곳
2. 환경 관련 프로젝트를 경험해 보거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
3. 멘붕에 빠지더라도 내가 스스로 헤쳐나갈 수 있는 곳
4. 언어 소통이 어렵지 않은 곳 (영어권 국가)
이 중 가장 중요하게 고려했던 것이 1번과 2번이었다. 3번과 4번은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지라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있었는데, 1번과 2번은 이번 여행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가 달린 것일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해서 후보지에 오른 곳이 네 군데였다.
1. 인도네시아 Bali -> 다수의 해양 프로젝트 & 체류비 저렴
2. 호주 Great Barrier Reef 지역 -> 다수의 산호초 프로젝트 & 영어권 국가 & 추후 직업으로 연계 가능성
3. 영국 Portsmouth -> 예전에 살았던 나라 & 다수의 해양 프로젝트 & 친척과 친구 거주
4. 미국 California -> 요즘 대세인 나라 & 해양 프로젝트 & 친척 거주
1,2,3,4번 사이에서 하루에 열두 번도 더 고민을 했다. 어제는 인도네시아, 오늘은 영국, 내일은 호주, 모레는 미국으로 결정되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몇 달째 고민만 하다가 퇴사 2주 전에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결정된 국가는 영국과 네덜란드다. 항공사는 핀에어.
핀에어는 내가 가장 많이 이용하는 항공사다. 유럽에 있을 때 항공기 사고가 종종 일어나서 어느 순간 비행기 공포증이 생겼었다. 사고 확률이 적은 항공사가 있을까 찾아보다가 핀란드의 운전면허증 발급 과정을 알게 되었다. 핀란드는 운전 면허증 취득 후 2년 동안 Graduated Licensing System을 운영하는데, 이 기간 동안 운전자 과실로 심각한 사고가 발생할 경우 면허가 취소될 수 있다. 핀란드는 추운 국가여서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 날이 많은데, 이런 환경을 뚫고 정식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아 운전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대단할까 싶었었다. 하물며 운전면허증도 이런데, 항공기 면허증 시험은 얼마나 더 까다로울까 싶은 마음에 핀에어를 많이 이용했었다. 핀란드는 프랑스나 독일처럼 난민이나 종교와 같은 세계적 이슈에서도 다소 자유로워서 테러의 대상이 될 확률이 낮을 것 같다는 생각도 있었다.
아무튼, 안정성을 바탕으로 가격까지 고려했을 때 핀에어가 적합하다고 판단했고, 영국까지 가는 길에 헬싱키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환승 시간을 최대로 하여 티켓팅을 했다.
드디어 출발일. 밤 11시에 설레는 마음을 안고 비행기에 올랐다.
잠시 후 비행기가 출발했다가 다시 게이트로 돌아왔다. 그 후 1시간이 지나도록 출발하지 않는다. 기장님이 비행기 시스템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 확인 중이라고 했다. 30분쯤 후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We are not flying with the defected craft"
어떤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비행기가 출발했다가 되돌아왔다는 것은 출발 전 점검에는 문제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이륙 전 문제를 발견했고, 해결하기 전에는 비행을 하지 않겠다는 기장님의 멘트가 안심이 되었다. 시간이 많이 지연되어서 컴플레인이 발생할 수 있지만, 안전을 우선시하는 느낌을 주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장거리 비행이라 공간이 넓은 좌석을 예약한 과거의 나 자신의 선택을 칭찬했다. 시스템 재부팅을 여러 차례 하느라 비행기 전체 전원 셧다운을 4-5번 한 후 겨우 출발했다. 비행기에 탑승한 지 3시간이 지난 후였다.
경유지인 핀란드까지는 13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했다. 예전에는 8시간이면 도착했는데, 이게 다 러시아 전쟁 때문이다. 비행시간이 늘어났기 때문에 그만큼 탄소 배출량도 증가했다. 어서 해결이 되면 좋겠다.
핀란드로 가는 루트는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북극권을 통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쪽으로 날아서 남유럽을 통과하여 북유럽으로 가는 것이다. 오늘의 루트는 남유럽이다. 3월 말임에도 핀란드는 겨울왕국이었다. 헬싱키는 핀란드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수도인데도 온통 눈밭이었다. 겨울을 지나, 봄이 올 무렵 다시 겨울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6년 만에 다시 찾은 핀란드는 하얀 눈으로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Hei Finland :)
핀란드의 입국 심사는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출국 심사도 까다롭다. 나는 환승 시간 동안 헬싱키 시내를 구경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환승 쪽이 아닌 입국 쪽으로 갔다. 내 앞에는 한국인 부부가 입국 심사를 받고 있었다. 어디 가냐, 얼마나 머무냐, 숙소 예약 리스트를 보여달라, 거기에는 왜 가느냐, 경비는 얼마를 가지고 왔냐, 이다음 여행지는 어디냐 등등 질문이 퍼부어졌고, 불법은 아니지만 유럽에 장기간 체류할 예정이었던 나는 덜덜 떨기 시작했다. 저 입국 심사관이 걸리지 않기를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입국 심사관은 한 명이었다. 어렵게 출발했는데 하루 만에 다시 한국땅을 밟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바로 그때! 입국 심사관 한 분이 출근했다. 시스템에 로그인을 한다. 저분이 어서 나를 불러주길 바랐다. 빨리빨리 나를 데려가라! 아무렴 지금 입국 심사관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었다. 드디어 새로 출근한 입국 심사관이 나를 불렀고, 나는 매우 기뻐하며 그에게 갔다.
Moi-!
착하게 보이기 위해 웃으며 핀란드어로 인사도 했다. 입국 심사관이 웃는다. 출발이 좋다.
다행히 몇 가지 질문을 하지 않고 입국 승인 도장을 찍어줬다. 긴장해서 곧 기억에서는 지워졌지만 헬싱키 시내의 맛있는 커피숍도 추천을 받았다.
그렇게 드디어 공식적으로 유럽 땅을 밟았다. 옆으로 멘 가방은 무거웠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Vantaa 공항 지하철역은 땅속 깊이 위치하고 있다. 마치 우리나라 9호선처럼 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와야 플랫폼에 다다를 수 있다.
지하철역 천장이 매우 매우 높고, 역 전체가 콘크리트로 되어 있어서 삭막하다는 첫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바닥을 본 순간 역시 북유럽인가 싶었다.
공항 방향을 가리키며 프린팅 된 비행기 아이콘 ✈️
인구도 많지 않은 도시에 지하철역이 너무 큰 것은 아닌가 싶었다. 나름 공항역인데 플랫폼에 나를 포함해서 5명 정도 있었다. 주말 오전이라 그런가.
2025년 1월 기준으로 핀란드 인구는 약 560만 명이고, 이 중 130만 명 정도가 수도인 헬싱키와 그 주변에 거주한다. 핀란드는 유럽에서 8번째로 큰 나라이지만, 땅의 75% 정도가 숲과 호수로 덮여있어서 전 세계에서 가장 숲이 많은 나라 중 하나이다. 어딜 가나 좀처럼 북적북적한 모습을 보기 어렵다.
Vantaa공항에서 시내까지는 지하철로 약 30분 정도 소요된다. 그래서 꼭 하룻밤을 머물지 않더라도 시내를 둘러볼 수 있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6시간. 오후 3시 반까지 공항에 돌아와야 한다.
시내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10시. 토요일이다. 가장 번화해야 할 main street인데 한산하다. 유명한 헬싱키 대성당 앞 광장도 한갓지다. 헬싱키 대성당은 1830년에서 1852년 사이에 지어진 복음주의 루터 대성당으로 일반적인 가톨릭 성당과는 사뭇 다르게 생겼다. 원래 명칭은 St. Nicholas' Church.
헬싱키 시내의 주요 교통수단은 트램인데, 노란색과 초록색으로 된 열차칸이 여러 개 이어져 있으며, 전깃줄에 연결하여 운행된다. 헬싱키의 트램 시스템은 무려 130년 전인 1891년에 처음 선보여졌다. 이 당시에는 말이 끄는 형태로 트램을 운영했고, 1900년대 초에 전기로 운행하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조용히 움직이는 오래된 트램은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시절의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 같다.
광장을 지나 바닷가가 보이는 마켓으로 향했다. 건물 사이를 벗어나서 탁 트인 바닷가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