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야 마주 볼 수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엔
보이지 않는 공기가 흐른다
그걸 지키는 자만이 오래 남는다
서로의 온도를 침범하지 않을 때,
비로소 관계가 숨을 쉰다
나바라 지방의 마지막 숨결인,
비아나에는 성당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순례자의 여권인, 크레덴시아에
세요를 찍어주고 있었다.
내가 걸어온 길이 고스란히
이 작은 종이 위에 새겨졌다.
순례길의 첫 마을인 생장에서
비아나까지 지나온 세요들을 보니,
그동안의 걸어왔던 길들이 스쳐갔다.
처음 생장에서 첫 발을 내디뎠을 때,
가슴 깊은 곳에서의 설렘.
피레네 산맥에서
길을 잃던 날의 두려움과,
그곳에서 만난 일행들과의
새로운 인연.
팜플로나에서의 흥분,
용서의 언덕에서의 휘몰아치는 바람과
자갈길이 깔린 내리막길.
에스떼야에서 비아나까지의
아름다운 풍광.
올리브 나무와 포도밭,
길가에 놓인 노란 화살표,
그 모든 것이 나를 걷게 했다.
그리고 수없이 스쳐간 사람들의 미소.
서로 이름을 모른 채,
눈인사 하나로 마음을 나누던 그 순간들.
그 미소 속에서 나는 위로받고,
다시 나아갈 용기를 얻었다.
그때의 온도가 내 안에 고스란히 남아,
스탬프 위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였다.
걷는다는 건,
결국 스쳐 지나가는 모든 순간을
가슴에 새기는 일이었다.
별들이 흐르는 길을
하나씩 하나씩 이동하는 그 과정은
'나를 향해 빛나는, 별을 찾기 위한 길'이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의
마지막 스탬프가 찍힐 때,
과연 어떤 느낌일까?
나바라 지방의 마지막 마을인 비아나를 지나
라 리오하 지방의 첫 도시인 로그로뇨를 향했다.
도심으로 들어가기 직전, 에브로 공원에는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하늘로 곧게 뻗어 있었다.
사이프러스는
바람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고요하게 서 있었다.
나바라의 길은 끝이 났지만,
라 리오하의 시작을 열어주는 문지기처럼
나를 새로운 길로 이어주었다.
로그로뇨 입구에는
에브로 강이 흐르고 있었다.
라 리오하의 붉은 땅으로 안내하는
강이었다.
하늘이 비치는 아름다운 강을
지나쳐가는 길이 아쉬웠지만,
우리 일행은 계속해서 길을 걸었다.
우리는 걸으면서,
일행들만 쉴 수 있는
아파트먼트를 예약했다.
함께 걷는 마지막 밤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일행들 중 한 명이,
귀국 날짜가 빠듯해서
일정을 서둘러야 했기 때문이다.
"부르고스까지
30킬로미터 이상 걸어야 해요.
그리고 부르고스에서 자전거 대여해서
레온 구간을 빠르게 지나와야,
귀국 날짜에 여유 있게
도착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내일 숙소 예약하려는데
30킬로미터 이상 걸을 수 있으면,
미리 말해 주세요.
지금 같이 예약할게요.”
나를 포함한 세 사람은
30킬로 이상 걷는 일정은
엄두도 못 냈다.
그야말로 오늘은 우리 네 명이 함께 하는
마지막 날이었다.
한 명은 일정이 빠듯해
서둘러 산티아고에 도착하기를 원했고,
다른 한 명은 오로지 숙소에 가기 위해
전투하듯 걷기 싫다고 했다.
천천히 걷다가 이쁜 마을이 있으면,
머물면서 만화도 그리고
여유 있게 걷고 싶어 했다.
마지막 한 명은 순례길을 걸으면서
성당 미사를 받고 싶어 했다.
나는 천천히 걸으면서 풍광을 느끼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순례길에 오른 이유가 저마다 달랐기에
우리는 각자 혼자서 걷기로 했다.
처음엔 이유가 분명했다.
하지만 함께 걷고 함께 머물며,
우린 조금씩 자신이 걷고자 했던
길의 의미를 잃어갔다.
자신의 속도대로 걸어야 할지,
일행을 기다려야 할지,
끊임없이 내면의 갈등이 있었다.
서로의 속도를 맞추기 위해
자신들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함께 보내는 마지막 밤,
아파트먼트의 하루는
그야말로 편했지만 편하지 않았다.
화장실과 샤워실 이용을 위해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 뒤,
허기진 배를 채우며
푹신한 소파에 몸을 기댈 수 있었다.
그러나,
편안함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순례자가 아니라,
친구들과 여행 온 기분이었다.
다시 순례자들이 많이 모여 있는
알베르게에 머물고 싶어졌다.
알베르게는 불편했지만
순례자들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고,
그 안에 있을 때,
내가 진정 순례자인 것 같았다.
'나는 왜 순례길을 걸으려고 했을까?'
길을 걷는 내내,
아주 사소한 결정이라도
내 인생에,
다른 사람이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가 아니다.
끊임없이
내가 걷는 이유를 되뇌지 않으면,
내가 걸으려고 했던 진정한 길은
사라지는 것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을
배려해야 했기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내가 순례길을
왜 걷기 시작했을까?'
다시 그 이유를
생각해야만 했다.
나는 깨달았다.
친한 사이가 될수록
적절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오늘밤,
당신의 마음에
별 하나,
놓고 갑니다."
[시안블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