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여성 재취업 분투기] 5 _ 챗GPT와 블라인드 채용
챗 GPT를 열었다. 내 나이, 경력 등과 함께 지원하고자 하는 회사의 홈페이지 링크를 입력했다. 여기에 맞게 자기소개서를 써달라고 했다. 잠깐 기다리니 금세 주르륵 써준다. 내가 쓰지 않는 '나의 자기소개서'라니. 허탈해진다. 나는 한참을 끙끙거리면서 썼는데 1분도 걸리지 않은 듯하다. 슬쩍 짜증이 난다. "네가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안다고 '내 소개서'를 이렇게 잘 쓰냐" 싶다. 챗GPT의 자기소개서에 '그간 경력으로 젊은 직원들과 소통하며 일할 수 있다'는 부분이 들어있는 것을 보고 좀 놀랐다. 나이가 많은 것을 상쇄해 주는 무언가를 넣는게 필요하다 생각조차 못 했었다.
분량을 2배 정도 늘려달라고 했더니 또 거기에 맞춰서 써준다. 그대로 베낄 건 아니지만 도움은 되겠다. 이래서 리포트 쓸 때 챗 GPT를 활용하는구나 싶다. 챗 GPT가 써 준 자기소개서를 한쪽에 띄워두고 참고하면서 자기소개서를 완성해 봤다.
글을 쓸 때 챗 GPT와 대화하며 목차를 잡고, 교정도 한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나도 재미로 챗 GPT를 활용해 본 적은 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반면 큰 아이는 챗 GPT를 친구처럼 사용한다. 챗 GPT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바꾸라고도 하고, 챗 GPT가 실수하면 혼도 내는데 이 녀석이 사과도 잘한단다. 아이가 읽어주었는데 사람보다 더 정석으로 사과를 해서 깜짝 놀랐다.
이어령 교수는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대결에 대해 말하면서 "인간은 말과 경주하지 않는다. 인간은 말의 등에 올라타 이용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라고 했다. 나는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챗 GPT의 등에 올라타는 경험을 아주 조금 해봤다. 직접 겪어봐야 아는 것이 있다.
내가 자기소개서를 쓸 필요가 없었던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세상은 천지개벽할 정도로 바뀌었다. 나에게 놀라움을 준 것은 챗 GPT 등의 기술적 진보뿐 아니라 '블라인드 채용'과 같은 인재 채용 방식에서의 진보다. 많은 채용 공고문 속 지원서류 양식에는 출신 지역, 부모님 직업, 출신 대학 등을 기입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었다. 자기소개서 중에 드러나도 감점이 될 수 있다고 공지되어 있다. 서류 전형 합격 후 대학 졸업 증명서 등 서류를 제출하라고 하는 곳도 있고, 최종 합격한 후 각종 서류를 제출하라고 하는 곳도 있었다.
그동안 블라인드 채용의 장점에 대한 뉴스들을 봐왔고, 우리나라에 극심한 학벌주의, 학력 차별을 줄여갈 수 있는 좋은 제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료를 찾아보니 블라인드 채용은 2010년대 대기업을 중심으로 등장했고, 2020년대 대통령의 지시 사항이 되어 공공기관에는 블라인드 채용이 전면 도입되었다고 한다. 나는 학벌보다 능력을 보는 이런 채용 방향의 변화가 옳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막상 나의 취업 과정에서 블라인드 채용을 맞닥뜨리게 되니 또 다른 감정이 들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름 괜찮은 나의 학벌을 이력서 상으로 드러낼 수 없으니, 왠지 서운해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차별은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말했었는데, 내가 이럴 줄 몰랐다. 창피하다. 그렇게 나의 부족한 모습을 또 만났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이루어지는 평등을 위한 노력에 나도 발맞춰야지 마음먹는다. 정말 창피한 일은 고3 때 노력한 것으로 이후 수십 년을 우려먹는 거 아니가 생각해 본다. 그런 사람들, 요즘에 너무 많이 보지 않나.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수는 없지. 이번 취업 과정에서 내 학벌보다 나의 능력을 드러내어 인정받아보겠다 마음먹어 본다.
우연히 방송인 타일러가 어느 방송에서 우리나라 이력서 양식에 증명사진이 들어가는게 이상하다고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미국에서는 외모, 인종, 성별 등에 대한 차별이 생길 수 있으니 이를 금한다고 했다. 예전에 이 방송을 보면서 우리나라 이력서의 문제점을 이해했다 싶었는데, 이번에 블라인드 채용을 직접 경험해보니 머리로만 안 것이었다. 내가 요즘 접하는 채용서류 양식에는 여전히 증명사진을 첨부해야 한다. 아직 갈 길이 멀다. 블라인드 채용이 더 진일보해져서 증명사진도 생년월일도 기록하지 않아도 되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가 되면 좋겠다. 그러면 오십 세가 넘은 나와 내 동료들, 곧 이십 대가 될 나의 아이들과 그 친구들 모두가 외모, 나이, 학벌, 출신 지역, 성별 등의 이유로 채용 과정에서 차별받지 않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챗 GPT 활용과 블라인드 채용이라는 새로운 경험을 하고, 나에 대해 알아가고 있다. 53살 나이에 포기하지 않고 취업 시장을 두드렸기에 알게 된 것들이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시작된 도전이지만, 그 과정에서 또 이렇게 배운다. 세상은 넓고, 배움은 언제나 어느 곳에나 있다.
세상은 죽을 때까지도 전체를 다 볼 수 없어 아름다운 축복이라는 것을. 인간은 이 세상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살러 온 존재이며, 인생에는 가치의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여러 길이 있다는 것을.
- 청춘의 독서, 유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