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요.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
"어려워요. 당신을 더 알고 싶지만 서로의 대화가 끊기는 것 같아요."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내가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미안해요. "
"... 미안해요. 중요한 순간에 계속 연락을 못해서 미안해요. 나는 그냥 당신이라는 사람 자체를 알아가고 싶어요. 딱히 뭘 더 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줘요. 미안해요.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 "
- 당신과의 대화 중 -
나와 친해진 사람들은 가끔 내게서 상당한 거리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가끔, 아니 많이 서운하다고 하며 조금 더 다정하게 말해줄 수는 없냐고 투덜거리곤 했다.
"난 너랑 이렇게까지 친해질 줄은 몰랐는데 우리 왜 이렇게 많이 붙어 다니냐.."
"같은 과라서 그런 거 아니냐. 집도 근처고. "
"아니 그럴 땐 우리가 잘 맞아서라고 말해주는 거야 멍청아."
예전부터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사람들과 친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나는 대화의 온도를 조절하는 법을 잘 모른다.
나는 어디까지 나를 보여주는 게 맞는지도 아직 잘 모른다.
어떤 순간에 어떤 말을,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그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뒤죽박죽 엉켜
타이밍을 놓쳐 말을 못 하기에. 이젠 그냥 별 다른 생각 없이 대답을 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항상 서운함으로 돌아오는 것 같다. 나는 그렇게 다정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타인에게 관심이 많은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관심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무심한 그런 모두의 인생에서 지나가는 행인 3 정도 되는 사람이랄까.
물론 그 모든 것은 내가 선택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겠지만. 그래도 가끔은 아쉬울 때가 있다.
과거의 나는 훨씬 이것보다 말도 잘했고, 재밌고, 밝은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문뜩 떠올랐다.
지금의 나는. 글쎄 어떤 사람일까.
당장 내 앞에 놓인 선택지만 해도 수십 개가 되고,
각 선택에 따라 너무나도 확연히 내 삶이 달라질 텐데라는 고민으로 뒤덮인 날들은 타인에 대한 배려를 조금은 미뤄둘 수밖에 없게 만든다.
조금 더 당신에게 관심을 주고 싶은데 내가 당장 여력이 안되네 미안해.
이젠 차라리 혼자인 게 편하다고 느껴질 때가 너무 많다는 사실이 조금은 슬프게 여겨졌다.
내가 스스로에게서 유일하게 좋아하는 점이 있었다면, 그건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것,
인간관계를 잘 만들어가는 것, 사람들과 함께 떠들며 웃고 즐기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었는데 이마저도
요즘은, 잘 모르겠다.
유학생활을 시작한 지 딱 한 학기가 되었지만,
나는 많이 변했다.
가족들에게도, 친구들에게도, 연인에게도 나는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물론 지난 3년간 나에게 많은 선택지들이 있었고, 그 선택의 연속으로 지금의 내가 살아가고 있을 테니
어쩔 수 없나 란 생각이 들지만, 그 선택을 할 당시에는 그게 나의 인생의 전부인 것 같아서.
그 선택의 고비들을 넘기는 것 자체가 힘들어서, 주위를 둘러보거나 방향성을 찾아볼 시간이 없어서.
그래서 그 순간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쌓이고, 연결되어 하나의 결괏값에 슬슬 도달하고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아차렸다.
부모님과 통화하던 도중
"다른 애들은 다 한국 들어오던데, 너만 안 들어오네~ 다들 한국 들어오고 싶다고 난리라던데."
"아직은 괜찮아요."
"아직 안 힘들어서 그런가 보다."
"... 다음 방학 땐 들어갈게요. "
"그래. 연락 좀 자주 하고, 많이 변해서 이젠 못 알아보겠다."
아니요 어머니. 나는 아직 안 힘든 게 아니라, 지금 나에게 다가오는 선택들을 해결하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가라앉을 내 모습이 두려운 거예요. 그래서 나 말고는 지금 다른 누구를 생각할 시간도, 그리움을 가질 시간도 없는 거예요. 나는 변해버린 내 모습이 어색하지 않아요. 당장 나에게 닥친 선택들이 너무 많거든요. 그걸
견뎌내기에도 나는 아직 약해요. 미안해요. 아직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 이 모든 걸 소화하기엔,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가기엔 시간이 없어요. 힘들다고 말할 시간조차요. 그 모든 게
지금의 내겐 사치인걸요. 이미 괜찮은 척하고 웃어 넘기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어요. 혼자 있는 게 습관이 되었어요. 나는 그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게 지난 몇 년간의 내 선택의 결과예요. 당장 살아가기에도 나는 나약한 걸요.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더라면, 행복했던 순간들이 없었더라면, 아니 그게 이제는 다시는 이뤄질 수 없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더라면. 차라리 과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다면.
이 모든 생각들이 들 때마다 습관적으로 찾는 담배를 피는 시간만이 유일하게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찬 바람과 함께 몰려오는 회의감 속에서 나는 오늘도 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버티고 있지 않았다. 이미 많은 것들에서 도망쳤고, 많은 것들에 대한 책임에서 그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내가 하찮게 여겨졌다.
차라리 그 모든 선택들을 하기 전으로 돌아갔으면 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이미 지나가버린 것들에 대해,
내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결론들에게 미련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거리감을 두는 게 훨씬 편해졌다. 아무도 나를 알 수 없게 - 나 자신을 짓밟는 내 모습을 보지 못하게
스스로 작은 방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편해졌다. 나는 다시 도망치며 내 앞의 선택지들에 눈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