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푸른연못 Dec 22. 2023

열차

회색 코트에 통이 넓은 검은색 슬랙스를 입은 여자가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내 앞을 아주 가까이 지나갔다. 그는 로비를 한 바퀴 천천히 돌고 다시 돌아와 내가 내려놓은 베이지색  인조가죽 가방 옆에 앉았다. 그와 나는 네 칸짜리 의자의 오른쪽과 왼쪽 끝에 앉아있게 되었다. 내가 왼쪽, 그가 오른쪽이다. 내 옆에는 내가 내려놓은 가방이 있고 그 옆에는 그의 검은색 천가방이 놓여있다. 우리는 두 개의 가방이 놓인 거리만큼 떨어져 있다. 내 뒤에 앉은 사람은 계속해서 다리를 떨며 의자를 발로 차고 있다. 그 사람이 의자를 발로 찰 때마다 내가 앉은 의자가 충격을 받아 흔들리고 그 의자에 몸을 지탱해서 앉아 있는 내 몸도 흔들린다.

여자는 가방을 열어 소지품을 꺼내 의자 위에 한 개씩 올려놓기 시작한다. 눈앞의 스크린에서는 '조현병 환자들이 겪는 증상들은 일반일들도 겪는 것입니다.'라는 문구가 지나간다. 내가 손가락으로 넘기고 있는 페이지에서는 영원히 꿈속을 사는 것만 같은 삶을 사는 여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나눠먹을까요? 우리 이거 나눠 먹을까요? 여자는 고개를 쭉 내밀고 내게 몸을 가까이 숙이며 상자에 포장되어 있는 공산품 양갱을 하나 건넨다. 여자가 가까이 오자 그에게서 매운 향신료 냄새가 난다. 그제야 똑바로 바라본 여자의 얼굴이 보인다. 창백한 피부다. 그에 대조되는 곱슬거리고 짧은 붉은 머리카락과 검게 번져 있는 눈화장을 한 노인이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인사를 하며 잘 먹겠다고 말하며 양갱을 받아 가방에 넣는다. 여자는 자기 몫의 양갱을 하나 더 꺼내 포장지를 뜯고 반으로 나누어 팔을 뻗어 내 뒤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권한다. 감사합니다. 목소리를 듣고 의자를 발로 차던 주인공은 남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남자는 양갱을 받는 순간 의자를 발로 차고 다리를 떨던 것을 멈추었다. 건조하고 텁텁한 온기가 느껴지는 실내에서 양갱을 조용히 씹고 삼키는 소리가 들려온다. 남자는 얼마 안 되어 1번 진료실로 들어간다.

한 달 전에 예약을 했는데도 나는 한 시간이 넘게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조금은 화가 나고 답답하다. 여자는 앞뒤로 몸을 움직이고 있는데 마치 시계추의 움직임 같다. 크게 눈에 띄지 않지만 존재감이 있으며 일정하다.

진료실에서 나와 수납을 하고 약을 받는 동안에도 여자는 아직 진료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시계추 같은 움직임은 아직 진행 중이다.

밖으로 나오자 찬 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해가 짧아져 오후 5시인데도 주변이 모두 검게 물들어 있다. 퇴근 시간의 도로에는 비상등을 켠 차들이 붉게 포진해 있다. 택시 안에서 도로에서 번져나가는 포말을 바라보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내가 보인다. 공포나 불안에 갇혀 있는 때마다 나는 그 속에서 1인칭으로 행동하면서 나를 3인칭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어떤 행동을 하는 주체이면서도 그 행동을 하는 나를 스크린 속의 인물처럼 바라보곤 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에 살면서도 과거에 사는 느낌을 받고는 한다. 언제나 꿈을 꾸는 상태이거나 이미 지나온 시간 속으로 다시 돌아가 느끼는 감정들을 되풀이하는 삶을 살고 있다. 비디오테이프를 맨 처음으로 되감기 하는 중이다.

어항에 잠겨 있는 나를 본다. 나는 어항에 잠겨 있다. 세상이 어항에 잠겨 있다.


작가의 이전글 폴록에서 온 사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