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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계절

2021년 10월 18일

by 황필립

할머니는 은은한 광택이 흐르는 옥색 한복을 입고 미소를 지은 채 액자 속에 갇혀 있었다. 포착된 행복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병원에 도착해 할머니가 누워 있는 병실에 들어갔을 때 할머니는 눈을 감은 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할머니의 손은 차갑고 부드러웠다. 죽음은 너무도 빠르게 온기를 빼앗아 간다. 떠난 이들에게서 빼앗아 간 온기들을 축적해온 죽음의 내부는 모든 것을 태워버리고 녹여버릴 만큼 뜨거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누워 있는 침대로 쓰러지듯 몸을 숙여 떨리는 두 손으로 할머니의 벌어진 입을 닫아주려 했지만 굳어져 가는 근육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편히 가서 다행이라는 말을 할아버지는 끝없이 반복했다.

병실의 창문 쪽에 놓여있는 탁한 회색빛 인조가죽 소파 옆에는 조화가 담겨있는 커다란 화분이 있었다. 조화의 조잡하고 화려한 색채는 병실 창문을 통과해 들어오는 몇 줄기의 햇빛을 포함하여 그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빨아먹으며 기생하는 것처럼 보였다.


의사가 할머니의 감긴 눈꺼풀을 벌리고 불을 비추었을 때 할머니의 나무껍질 같은 홍채는 여전히 삶을 간직한것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사망선고를 내리는 의사의 경건한 리듬만이 살아있을 뿐이었다.

가족들은 잠시 병실 밖에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마른 체구의 젊은 남자와 중년의 남자가 나타나 말했다. 그들은 병실 문을 닫았고 그들이 다시 병실 문을 열었을 때 할머니는 하얀색 천을 두르고 나왔다. 가족분들은 1층 장례식장 상담실로 가시죠. 그들은 그렇게 말하며 할머니를 지하통로로 데려갈 준비를 했다. 할아버지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억누르며 자신도 같이 가면 안 되겠느냐고 부탁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우리는 죽은 할머니와 같은 통로로 빠져 나갈 수 없었다.


할머니가 떠난 후, 한파 주의보가 내려졌다. 예고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급격한 추위였다. 가을은 사라진 계절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곧 계절의 부재에 익숙해지고 바뀌어 가는 환경을 받아들이며 그 속에서 적응하며 살아갈 것이다. 사라져간 계절을 때때로 그리워 하면서.


나는 사라진 계절이 잊혀진 계절이 될까 봐 두려워졌다. 아마도 나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절이 떠난 자리의 주위에서 방황할지도 모른다.


대기에서는 미약하게 겨울냄새가 떠다녔고 발을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그 냄새의 존재는 분명해져 갔다. 겨울냄새가 짙어질수록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은 늘어만 가고 그들의 향기는 희미해지고 있었다.


도톰하고 생동감 넘치는 죽음은 외관상으로만 인간의 모습을 하는 나의 허물을 이야기한다.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부끄러움이 커질 수록 살아있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현실이었다.


정교하지 못하고 정리되지 못한 감정들이 끈적거리며 서로에게 엉겨 붙어 동물의 검붉은 내장처럼 꿈틀거리며 나의 뒤를 밟는다.


출구를 찾지 못해 쫓기고 있는 나는 결국 나의 슬픔에게 거처를 마련해주지 못했다. 갈 곳을 잃은 슬픔은 분노와 증오로 바뀌기 쉽다는 것을 사라진 계절 속에서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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