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무관심 속에서도 스스로 생을 이어 가는 것들이 있다.
건조한 공기 속에서 모래바람을 맞으며 살아가면서도 가시로 자신을 지킬 줄 알고 이따금 자신의 몸을 적시는 빗물을 저장해 굳건하게 서있는 선인장이 그랬다. 나도 선인장처럼 나를 지킬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직 나에게는 두려운 것이 많았다. 여러 면에서 선인장은 나보다 강인했다.
화분 하나를 들여 관심과 애정을 쏟고 싶었는데 선인장은 나보다 강인했기에 나는 그것을 돌보는데 부족한 사람이었다.
나를 닮은 화분을 데려오고 싶었다. 내게 세심한 관심과 애정이 필요한 것처럼. 나와 같은 것을 필요로 하는 화분을.
이사를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길을 잘 모르지만 가까운 꽃집을 찾아 집을 나섰다. 눈과 발길이 닿는 곳은 모두 낯설었다. 한참을 헤매다 고급 의류를 파는 상점과 보석가게를 지나 흰색 간판으로 된 꽃집을 발견했다. 가게 안은 은은하고 부드러운 조명으로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가게의 주인은 젊은 사람으로 길고 검은 생머리에 흰색 후드 집업을 입고 발목이 보이는 연청색의 바지를 입고 있었다. 아마도 나와 나이가 비슷할 것 같았다. 나는 유리로 만든 반짝이는 화병들을 보며 여자에게 물었다. 꽃이 피는 식물을 원하는데 키우기 어려울까요.
여자는 어렵지 않다면서 가게 한 편의 커다란 종이박스에서 몇 가지를 꺼내 보여주었다. 오늘 들여온 것들이라고 했다. 그중에는 천리향이 있었다.
내 오른쪽 팔에는 국카스텐의 노래 오이디푸스 가사인 '견디어 낸 아침이 기다릴까'와 함께 천리향이 새겨져 있었다. 천리향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꽃말 중에서 '용기'라는 꽃말이 좋아서 새긴 것이었다. 나는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다. 용기라는 꽃말을 가진 천리향을 곁에 두고 함께 하며 서로를 돌본다면 나도 사람처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걸로 주세요.
방금 들어온 것들이라 아직 준비가 안됐어요. 화분에 옮겨 심어드릴 수 있는데 그러면 가격이 좀 비싸져요. 여자는 곡선 형태의 흰색 도자기 화분을 보여주며 괜찮은지 물었다. 천리향을 화분에 옮겨 심으려는데 다른 손님이 가게 안으로 들어와 프리지어 세 다발을 주문했다. 가게의 주인은 나에게 조금 기다려 줄 수 있느냐고 양해를 구했고 나는 가게의 꽃 냉장고 안을 구경하며 기다리기로 했다.
복숭아빛의 리시안셔스, 흰색과 노란색의 튤립 사이로 파란색 수국이 보였다. 수국은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었다. 다섯 살 때, 가족들과 차를 타고 산을 지나고 있었는데 엄마가 아빠에게 잠깐 차를 세워 달라고 했다. 차에서 내리자 분홍색, 보라색, 파란색 수국이 가득했다. 엄마는 꽃밭의 주인에게 수국 한 송이를 가져가고 싶은데 얼마를 드려야 하냐고 물었다. 밭의 주인은 돈을 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며 알록달록한 꽃밭에서 수국 몇 송이를 잘라주었다. 알록달록한 수국 다발을 건네받은 엄마는 그날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감정 기복이 심하고 그에 따라 언제 변할지 모르는 엄마의 행동에 눈치를 보며 불안에 떨었던 나는 그런 엄마를 보니 낯설면서도 좋았다. 엄마를 행복하게 해주는 수국도 좋았다. 수국이라는 꽃을 그때 처음 알았으면서도. 하지만 수국을 보면 엄마 생각이 났고 그래서 괴로웠다.
여자의 목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오래 기다리셨죠. 죄송해요. 기다려주셔서 감사해요. 원래 이만 오천 원인데 이만 이천 원만 주세요.
나는 계산을 하고 천리향 화분을 품에 안았다. 가게를 나가려 문을 밀자 딸랑 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예쁘게 키우세요라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분을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천리향 특유의 달콤하고 진한 향기가 코끝을 맴돌았다.
볕이 잘 드는 오후에는 발코니에 화분을 두었다가 밤이 되면 거실의 테이블 위에 두었다. 닫혀 있던 꽃봉오리는 날이 갈수록 활짝 피어 달콤한 향기를 내뿜었다. 새로운 자리를 잡은 나는 천리향과 서로의 보살핌을 받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길을 가다 꽃집의 쇼윈도를 통해 수국이 보여도 엄마 생각 때문에 괴롭지 않다. 엄마가 두렵지도 않다. 하지만 엄마를 용서한 것은 아니다.
엄마와 있던 과거의 상처는 완전히 아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이제 그것들을 잊고 지내게 될 만큼 사는 게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꽃이 주는 것은 달콤한 향기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나에게 주는 것은 용기와 삶에 대한 열망이었던 것이다.
'비로소 밤을 이겨 내고 발을 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