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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연못 Mar 27. 2022

돌아온 계절과 지나간 피아노 연주

2021년 12월

머리에 죽은 거미가 있어요. 신호를 기다리며 맞은편 도로에 있는 상점들의 간판을 읽고 있었던 내게 중년의 여자가 다가와 말했다. 그는 엄마와 나이가 비슷해 보였고 채도가 낮은 곤색 누빔점퍼를 입고 있었다. 그는 내 머리카락에 붙어 있던 거미를 조심스럽게 떼어내며 죽은 거미가 어쩌다가 내 머리에 붙었는지 궁금해했다.


신호가 바뀌자 낙엽들이 빗방울과 섞여 떨어지기 시작했고 행인들은 옷깃에 고개를 파묻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빠르게 걸어갔다. 비가 그치고 나면 눈이 내릴 것이라는 짧은 기사가 잠시 머릿속에 머물렀다가 이내 내가 목을 매달았었던 10월이 다시 돌아온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목을 매단 후 뇌사 상태에 빠져 중환자실에서 저체온 치료를 받았었다. 나의 연명치료를 포기하겠다는 서류에 엄마가 서명을 하려고 할 때 나는 깨어났다. 깨어난 지 일주일이 넘게 지나서야 나는 내가 깨어났던 날에 좋아하는 피아니스트의 단독 공연이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고 아쉬워했다. 살아난 것은 싫었지만 쇼팽의 곡을 새롭게 해석하여 강렬하고도 우아하게 연주 하는 걸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은 후회되었다.


비가 그친 후, 날씨가 매우 추워졌지만 눈은 내리지 않았다. 짙은 겨울 안개 뿐이었다. 죽은 친구들의 이름표를 신발장에서 뜯어내 잘게 조각내어 창밖으로 날려 보냈을 때도 안개가 짙었다. 친구들의 이름이 적힌 하얀 종이는 매서운 눈보라를 타고 멀리 사라졌다. 아이가 죽었던 날에는 길이 모두 꽁꽁 얼어 나는 자꾸만 넘어졌다. 굵은 눈송이와 우박에 뺨이 긁혀 붉게 부어올랐고 나는 빙판길에 무릎을 꿇은 채 울었다. 의사는 나에게 잊어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라고 했다. 간호사는 내가 너무 어리다며 아이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해주지 않았다.


암흑 속에 있는 나무의 가지와 이파리 사이로 자동차 후미등의 붉은 빛이 선명하게 보였다. 주차장의 움푹 팬 구멍에는 종일 변덕스럽게 내린 비가 고여있었고 그 위에는 담배꽁초들이 떠다녔다. 그 검은 호수에는 후미등에서 나온 불꽃이 번져 붉게 타올랐다.


내 삶의 도입부에 흐르던 음악은 내가 선택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내 삶이 끝날 때의 음악은 악기와 음표를 직접 섬세하게 조율하고 배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삶에는 의도하지 않은 변주곡들이 나타나고 부수적인 울림들이 나를 떨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변주와 울림들은 불현듯 생겨난 건 아니다.


잡화점에 들어가 유리로 만들어진 트리를 하나 샀다. 한 손에 들어오는 작은 크기이다. 작은 유리 트리는 눈송이가 반짝이는 은색 물감으로 칠해져 있었다. 눈이 내리면 나는 떠나간 이들의 이름을 되뇌었다. 나도 그 눈 속으로 들어가 사랑하는 사람과 걸어갈 수 있을까.


세상은 불완전하게 지어지고 이름이 붙여졌다. 그 혼란 속에 나는 방황하다가도 별을 기억하며 숨겨진 음표를 찾아 모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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