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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병든 짐승의 울음은 탄식이 되지 못하니

22.04.22 일기

by 황필립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그러나 낯선 움직임과 사건 속에 내가 있다. 설거지를 하다가 오늘 하루가 이미 전에 꿈속에서 경험했던 일과 똑같이 흘러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조차 꿈속에서 겪은 것과 똑같았다.


다음날이 되었을때도 나는 현실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꾸었던 꿈을 다시 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깨었있는 상태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느낌은 확신에 가까웠다.


폐허가 된 지 오래된 건물, 전기와 수도도 들어오지 않는 곳, 사람들을 비롯한 살아있는 생명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세상에서 나는 모든 것이 살아 있다는 망상에 빠진 것이다. 화려한 봄꽃들이 피어나 강렬한 색채로 장식된 거리를 사람들 속에서 섞여 다녔다는 망상.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고 사랑해주는 사람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망상.


불안과 공포가 밀려왔고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부스스한 머리카락과 늘어진 티셔츠, 속이 비치는 얇은 여름용 바지를 입었다는 건 신경쓰지 않았다. 승강기 앞에 서서 1층으로 내려가는 버튼을 누르기 전에 꽤 긴 시간을 망설였다. 이 승강기도 사실은 작동을 멈춘지 오래되었다는 생각. 승강기가 멈춰 있고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주하기가 두려웠다.


결국 다시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베란다에 둔 네 개의 화분의 풀잎들에 늦은 오후의 햇살이 연한 금빛을 뿌리고 있었다. 내 눈에 담겨 들어오는 저 풍경은 꿈일까 나의 망상일까 아니면 익숙한 꿈의 현실일까.


내가 의식하고 있고 살아움직이는 이 순간이 어린시절 잠들기 전에 거실에 누워 졸면서 스치듯 짧게 보았던 아주 오래된 옛날 영화처럼 느껴진다. 흥미롭거나 인상 깊은 장면이 없어서 기억에서 지워버린 영화 같다. 시간이 지나 우연히 다시 보게 되었을 때는 익숙함과 함께 그때는 발견하지 못 한 것을 알게 된 때의 낯선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영화.


밤이 되면 나무 위에는 잠 못 이루는 자들이 만들어 낸 불빛이 가지마다 앉아있다.

나는 오늘도 스스로 무너져갔으며 무엇도 기억하지 못한다. 희망에 병든 짐승의 울음은 탄식이 되지 못하니 - 꿈에서 깨어나길 바라며 잠에 빠져들기 위해 눈을 감는다. 그러나 눈꺼풀에는 원인 모를 죄책감과 나에 대한 혐오가 붙어있어 자꾸만 눈이 떠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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