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여행기 모음집 - 인도(1)
SNS에 '#여행'이라고 입력해보면, 멋진 풍경과, 이국적인 건물들 속에 환하게 웃고 있는 예쁘고 잘생긴 많은 사람들의 사진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들 중 일부가 될 수도 있다는 괜한 기대 때문인지, '여행'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게 되나보다. 지겨운 한국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꿈만 같은 저 장면들 중 하나에 아무런 걱정 없이 자유를 만끽하는 나의 모습이 있을 것만 같다. 취업을 위한 시험을 한 달 앞두고 인도 델리행 비행기 티켓을 구매한 것도 비슷한 기대 때문이었다. 평소에 여행을 좋아한다고는 말할 수 있었지만, 여태껏 가본 해외여행이라곤 가족과 함께 떠난 동남아시아 패키지 여행 두어 번, 대학교 1학년 때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모아 떠난 2주 간의 유럽 여행 한 번뿐인 나였다. 내가 과연 인도에서 여행은 커녕, 살아남을 수 있기나 할 것인가, 스스로 깊게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지겹게 반복되는 현실로부터 떠날 수만 있다면 어디든 좋다던 간절함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여행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여행에 있어서 여행을 준비하고 비행기를 탈 때까지의 시간은 분명 꿈속에 있는 기분이었지만 나처럼 여행 계획 세우는 것을 귀찮아하여 여행책 한 권 달랑 들고 비행기를 탄 사람에게는 공항의 입국심사에서부터 고달픈 현실이 시작되기 마련이다. 나는 2주 남짓 인도를 여행하면서 남들은 평생 한 번 당할까 한다는 사기도 몇 번 당하고 돈과 카드를 두 번에 걸쳐서 도둑맞았다. 2주 간의 인도 여행에서 3일째 되던 날부터 나의 고생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인도에서 두 번째로 방문했던 도시인 자이살메르는 사막 옆에 황금빛 사암으로 지어진 건축물들이 많아 일명 ‘골든 시티(Golden City)’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도시이다. 자이살메르를 여행하면서 나는 우연히 만난 한 커플과 동행하게 되었다. 벨기에에서 여행을 왔다던 제이콥과 바바라는 인상 좋고 친절한 20대 커플이었는데, 혼자 여행하는 내가 신기하다며 하루 동안 같이 다니자며 제안을 했다. 외로웠던 나는 좋다고 그들을 따라나섰고 그들과 호수에서 배를 타기도 하고, 시내를 돌아다니며 쇼핑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저녁에는 그들의 호텔로 초대를 받아 함께 맥주를 마시며 웃고 떠들기도 했다. 하루 동안이지만 그들에게 정이 들어 나중에 벨기에를 방문하게 되면 꼭 찾아가겠다고 연락처를 교환했다. 헤어지기 전에, 내가 다음에 향할 도시가 ‘조드푸르’라는 말을 듣더니 제이콥은 명함을 하나 건네주었다. 그 명함에는 한 호스텔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제이콥과 바바라 커플은 며칠 전 이 호스텔에서 아주 좋은 추억을 쌓았다며 숙소 예약을 하지 않았다면 꼭 그곳에 묵기를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그곳에 가면 장기 투숙하고 있는 ‘조쉬’와 꼭 친구가 되길 바란다는 말과 함께.
그렇게 여행에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들과의 아쉬운 이별을 뒤로 한 채 다음 도시인 조드푸르로 향했다. 자이살메르에서 버스를 타고 네 시간 정도 걸려 도착한 조드푸르는 영화 ‘김종욱 찾기’의 배경이 되었던 도시로, 구시가지에 파란 지붕의 집이 모여 있어 ‘블루 시티(Blue City)’라는 별명을 가진 자그마한 도시이다. 나에게도 공유와 임수정의 만남 같은 인연이 찾아올까 기대하며, 명함에 적혀 있던 호스텔로 향했다. 가장 싼 4인 도미토리룸에 하루 묵겠다고 말을 하고 직원의 안내를 받아 방에 들어가서 짐을 풀었다. 그때 옆 침대를 쓰고 있던 안경을 낀 인도인이 유창한 영어로 인사를 걸어왔다. “안녕, 내 이름은 조쉬라고 해. 넌 어디서 왔니?” 나는 놀라서 반문했다. “나는 한국에서 왔고, 방금은 자이살메르에서 오는 길인데, 네가 제이콥의 친구인 조쉬?”“제이콥을 만났구나, 그 친구는 나와 의형제 같은 사이지. 옆에 앉아봐. 이곳은 처음일 테니 이 도시에 관해 설명을 좀 해줄게.” 방이 하나만 있는 호스텔도 아니고 나름 묵고 있는 사람들도 꽤 있었을 텐데, 그 중 제이콥이 추천한 조쉬와 룸메이트가 되었던 것이다. 사람 인연이란 참 신기하구나, 생각했다. 물론 좋은 쪽으로 말이다.
조쉬는 정말 멋진 친구였다. 내가 살면서 만나 본 사람들 중에 이렇게 지적이고 유머러스한 사람이 있나 싶었다. 그의 침대 옆에는 두꺼운 영문 서적이 잔뜩 쌓여 있었고, 나와 이야기를 할 때에도 한 손에는 책을 들고 있었다. 조쉬는 인도 남부의 도시인 고아 출신의 현직 DJ이면서 인도의 특정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기도 한다며 스스로를 소개했고, 조드푸르에는 바로 그 연구 때문에 잠시 머무르고 있다고 말했다. 조쉬의 가장 멋진 점은 바로 삶에 여유가 넘치고 현재를 즐기며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호스텔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두 시간 정도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우리는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이며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 가치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시험을 준비하면서 과잉 불안으로 인해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상담 선생님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이 ‘미래에 대해 그만 걱정해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조쉬는 상담 선생님이 했던 말을 정확히 해주었다. “너는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눈빛 속에서 나타나고 있구나. 지금도 이 도시에서 무엇을 해야 하고, 다음 도시에는 어떻게 가야 할지 걱정으로 가득 차 있네. 너는 그런 마음으로 여행을 했다가는 조드푸르에서 무엇을 느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할 거야. 그냥 이 순간을 만끽하도록 노력해봐. 인생은 어떻게든 흘러가게 되어 있어.”
나는 마치 ‘구루(Guru)’를 만난 것과 같은 기쁨을 느꼈다. 내가 여행을 통해 찾고 싶었던 것이 바로 그것인데, 조쉬는 시원한 곳을 긁어주듯 나의 마음을 읽고 말로 표현해준 것이다. 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 조드푸르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한결 발걸음이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해가 지고 숙소로 돌아와서 호스텔 옥상의 레스토랑으로 향하니 조쉬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는 여유롭게 음악을 들으며 오랫동안 음식을 씹어 먹었다. “어땠어? 조드푸르는 정말 아름답지?”그가 물었다. “정말 고마워 조쉬. 그동안 여행했을 때와 정말 다른 기분이야. 너를 구루로 모실게.”“하하. 누구나 많은 것을 경험하다 보면 그 분야에 대한 지혜가 쌓이는 법이야. 참, 너 큰 돈과 여권은 잘 챙기고 다니는 거지? 아무리 현재를 즐기더라도 여기는 인도야, 항상 조심해야 한다는 점 잊지 말라고.” 인도를 여행할 때 나는 여행용 복대에 미리 찾아 놓은 400달러를 넣은 봉투와 체크카드 그리고 여권을 항상 넣어서 차고 다녔다. 조쉬의 물음에 나는 호스텔 침대 밑 사물함에 복대를 넣고 와이어 자물쇠를 잠근 채 옥상으로 올라왔던 것을 머릿속에서 되짚었다. “걱정 마, 조쉬. 침대 밑 사물함 알지? 거기에 넣고 와이어 자물쇠로 잠가 놓고 왔어. 이 정도면 안전하지?”“그래. 그럼 됐네. 됐어.” 우리는 몽환적인 일렉트로닉 음악을 들으며 별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오랫동안 나누었다. “친구가 생긴 기념으로 음료수를 한 잔 사주지.” 하며 조쉬는 레스토랑 주방의 냉장고로 향하더니 조금 찌그러진 사이다 두 캔을 가져와 나에게 주었다. 사이다를 마시고 긴장이 풀려서인지, 현재를 살게 되어서인지 기분 좋은 피곤함이 쏟아졌고 나는 잠시 몸을 못 가눌 정도로 피곤하다고 하며 내려가서 눈을 붙이겠다고 했다. 조쉬는 나와 어깨동무를 하고 함께 방으로 내려가서 침대에 눕힌 뒤,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함께 조드푸르 성 투어에 가자고 말을 한 뒤 자기는 조금 더 별을 보다가 내려와 자겠다고 말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눈을 뜬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사물함에서 복대를 꺼내 다시 찼다. 호스텔에서 체크아웃해야 했기에, 짐을 다 싸고 배낭까지 메었는데도 옆 침대의 조쉬는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조쉬, 나는 이제 떠나야 해, 조드푸르를 반나절 돌아보고 우다이푸르로 향하는 버스를 탈 거야. 어제는 정말 고마웠어. 나중에 또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연락처를 알려 줄 수 있어?”라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조쉬는 자신의 비공개 인스타그램 계정을 가르쳐 주었고 계정을 팔로우한 채 나는 호스텔을 떠났다. 그것이 내가 본 조쉬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인도 여행을 시작하면서 총 500달러를 갖고 가서, 필요할 때 100달러씩 루피로 환전해서 사용했다. 조드푸르를 돌아보다가 한 상점에서 마음에 드는 은반지를 찾았다. 한국에서의 가격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저렴했다. 호객 행위에 넘어가 반지를 구매하고 나니 잔돈이 부족해서, 남은 400달러 중 100달러를 환전하기로 마음먹었다. 복대에서 돈 봉투를 꺼냈다. 봉투에는 100달러 지폐 세 장과 50달러 지폐 한 장, 10달러 지폐 다섯 장이 들어있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돈 봉투와 여권, 체크카드까지 모두 그래도 있었는데, 정확히 100달러 지폐 세 장만 없었기 때문이다.
돈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도 내가 사기당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복대와 돈 봉투에 구멍이 났나 해서 복대를 꺼내 찬찬히 살펴보고, 돈을 꺼낼 때 혹시 떨어트렸나 해서 바닥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조쉬가 떠오르기도 했다. 조쉬라면 나를 도와주겠지. 그러다가, 조금씩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조쉬가 범인일 수도 있겠다.’
한달음에 호스텔로 달려가니 조쉬는 내가 떠나자마자 체크아웃을 했다고 한다. 분명히 장기 투숙을 하고 있어 언제 떠날지 모른다는 사람이, 그리고 내가 아침에 말을 걸 때만 해도 비몽사몽 종일 잘 것만 같던 그였다. 묵었던 방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고, 조쉬의 침대 옆에 잔뜩 쌓여 있던 책들도 먼지 하나 없이 사라졌다. 와이어 자물쇠를 다시 사물함에 채워보니, 사물함을 끝까지 당기면 손가락으로 복대 정도는 쉽게 꺼낼만한 틈이 생겼다. 내가 팔로우했던 인스타그램 계정 역시 사라졌다. 호스텔 직원은, 처음부터 그 사람이 조금 수상했는데 유감이라며, 투숙객 명부에도 조쉬라는 이름은 없고, 호스텔을 돌면서 돈을 훔치는 인도인들은 상습범이라 경찰에 신고해도 별수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어쩌면 내가 마셨던 음료수에도 졸음이 오는 약을 탔을 수 있다며, 앞으로는 인도인이 주는 음료수는 마시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망연자실한 나는 처음에는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가, 미친 듯이 억울해서 누구의 탓도 아닌 스스로의 탓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공유와 임수정의 아름다운 만남 같은 것은 없었다. 누군가는 인연을 얻은 도시에서, 나는 돈도 잃고 믿음도 잃고 자신감도 잃었다. 얻은 것이라고는 한화 17000원 상당의 은반지 하나뿐이었다.
지금도 조드푸르에서 샀던 은반지를 차고 다닌다. 사기꾼 조쉬를 생각하게 하여 분하기도 하지만, 이 반지가 없다면 내가 돈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없었을 것이니 한편으로는 행운의 반지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사기를 당했을 때는 사기꾼은 이미 사라진 후이기 때문에, 결국 탓할 것은 자기 자신뿐이다. 끝이 없을 것만 같던 자기 혐오와 억울함에서 벗어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아픔을 준 것도 사람이었지만 그것을 치유해준 것도 사람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지금은 다만 정말 순수한 궁금증 몇 가지 남아있다. 조쉬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때 나에게 해줬던 말은 진심이었을까? 400달러 중에 300달러만 가지고 떠난 이유는 무엇일까? 조쉬가 좋은 친구라고 소개를 해준 제이콥과 바바라 커플은 조쉬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