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여행기 모음집 - 인도(2)
혼자 여행을 떠나는 이유 중 하나는, 현지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나 역시 나처럼 혼자서 여행을 다니는 여행자 친구와의 교류나, 현지에서 사귄 현지인 친구들과의 특별한 경험에 대한 기대를 잔뜩 품고 있었다.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조쉬가 내 300달러를 갖고 감쪽같이 사라진 후 그런 기대는 많이 깨졌지만, 사람으로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잊으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세상의 모든 사람을 의심해야 했던 시간도 있었지만,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는 없는 법. 사람들을 겪으면서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하다.’라고 생각을 바꿔가며 조금씩 인간에 대한 신뢰를 회복했던 것 같다.
조드푸르에서 돈을 도둑맞고 다시 호스텔로 찾아가고 하는 일련의 소동이 지나간 후, 두근거리던 마음도 가라앉고 차분하게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최악의 경우에는 가족에게 도움을 청해서 체크카드로 송금을 받을 수 있었겠지만, 일단은 나의 불찰로 발생한 사건에 스스로 죗값을 치른다는 심정으로 ‘긴축재정 여행’을 해보기로 했다. 줄일 수 있는 비용부터 조금씩 줄여나가기 시작했는데 그중 가장 쉽게 줄일 수 있었던 것은 기념품 쇼핑이었다. 많이는 아니더라도, 여행을 기억할 만한 기념품을 하나씩 사서 모아두는 것이 나름의 취미였던 나인데, 여행이 서바이벌이 되고 난 후 생존에 필수적이지 않은 기념품은 사치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인도 관광지에서는 없을 수 없는 것이 호객 행위이다. 조드푸르에서도 수많은 호객 행위를 당했는데, 돈이 없던 나는 이전보다 더욱 뻔뻔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노 머니, 노 머니!”라고 말하면 웬만한 거리의 호객꾼들은 별말 없이 나를 보내주었다. 그러던 중 나에게 왜 돈이 없냐고 물어본 상점 주인이 있었다. 섬유와 옷을 파는 가게 주인인 5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아저씨는 여행자인데 그 정도 여유도 없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나에게 말하였다. 합리적인 지적이었지만 나름 억울한 마음이 들었던 나도 지지 않고 말을 했다. “사기를 당해서 내 돈을 다 잃어버렸다. 사고 싶어도 살 수가 없다.” 아저씨는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뭐라고? 더 자세히 이야기해봐.”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조쉬를 만났던 일과 300달러를 도둑맞은 일을 구구절절 자세히 영어와 몸짓을 섞어가며 이야기했다. 이 이야기를 유심히 듣고선 아저씨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에게 물건을 팔지 않겠다.”
그러고는 나를 가게에 앉히더니, 참 사정이 딱하다며 인도에서는 아무도 믿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를 해주었다. 인상 깊었던 것은 아저씨 본인도 인도인이기 때문에 나에게 자신의 말도 결국 인도인의 말이기 때문에 믿지 말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스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라던 고대 그리스 사람의 모순적인 주장이 떠오르면서 재밌어하던 차에, 누군가 가게에 들어오더니 무슨 일이냐며 자초지종을 물었다. 새로 들어온 40대 정도의 잘생긴 형님은 알고 보니 반대편에서 잡화 가게의 주인이자, 내가 앉아 있던 가게 주인아저씨의 동생 되는 사람이었다. 침착한 형과 달리 아우는 불같은 성격이었다. 자초지종을 듣더니, 정작 돈을 잃어버린 나는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본인이 불같이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이 녀석을 당장 경찰에 신고해서 잡아야 한다며, 이런 사기꾼 때문에 우리 같은 조드푸르 상인들이 욕을 먹는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동생 아저씨의 화내는 소리를 듣고 주변 상인들의 가게로 모여들었다. 하나둘 모인 상점 주인들은 어느새 열 명 남짓 되었고 ‘한국에서 와서 도둑맞은 불쌍한 배낭여행자’에 대해서 힌디어와 영어가 섞인 열띤 토론을 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열린 반상회에서 나는 어리둥절한 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정작 도둑맞아 화가 나야 할 것은 나인데 몇몇 상점 주인들은 나보다 더 화를 내서 “지금 당장 경찰서로 달려가자!” 소리치기도 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경찰서로 가도 소용이 없을 거라며 포기하라고 했다. 나 역시 범인을 잡아서 돈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은 처음부터 가진 적이 없었다. 그저 앞으로 어떡해야 할지 막막하여 우울한 것뿐이었다. 30분쯤 지났을까, 어느새 상점 주인들은 해결책이 났다며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너는 한국으로 돌아가 일을 하고 오늘 잃어버린 돈을 되찾을 것이다. 돈은 항상 돌고 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지은 죄는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 신들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손해를 본 것은 그 도둑이지 넌 오히려 이득을 본 것이다. 그러니 억울해하고 화를 낼 필요가 전혀 없다.”
시끄러운 반상회가 끝나고 나는 수많은 힌두고 신들의 가호(?)를 받으며 가게를 나올 수 있었다. 상점 주인들이 정말로 나에게 감정 이입을 해서 화를 내고 위로를 해준 것일까? 지금 생각해보면 아침부터 일을 하다가 지겹던 참에 재밌는 핑곗거리가 생겨서 이때다 싶어 열띤 반상회를 한 것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 가게를 나오고 나서 내 마음이 한참 가벼워졌다는 것이다. 진심이든 아니든 누군가 나의 감정에 공감해서 대신 화를 내준다는 것은 엄청난 치유 효과를 지닌 것 같다. 인생의 교훈을 얻은 것은 값으로 300달러 정도야 뭐, 라고 생각도 하고 앞으로 남은 여행이 순탄하도록 액땜한 것이라는 긍정적인 생각도 할 수 있었다. 물론 액땜 같은 것은 없었고, 남은 인도 여행도 고난의 연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