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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상구 변호사 Nov 09. 2017

203 어떤 三代

2009년 08월 21일

옛 위인을 회상하는 일은, 후손인 우리에게
선택의 기로에서 어떠한 길을 가야 할지에 대한 시사점을 주곤 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위인에 대한 법적 배려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한 일례가 역사학자이자 언론인으로 유명했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경우입니다. 



내가 죽거든 시체가 왜놈들의 발길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해서 재를 바다에 띄워라.


단재 신채호 선생(1880~1936)은 항일 독립운동가로서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중국 여순감옥에서 복역 중 1936년 2월 21일 옥사하였습니다. 


신채호 선생은 중국으로 망명한 뒤 박자혜 여사와 재혼해 두 아들을 낳았는데, 둘째 아들은 1942년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나 큰 아들수범 씨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단재 선생께서 1912년 일제가 ‘조선민사령’을 제정해 호적을 재편하려 하자 호적등재를 거부했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한 신채호 선생의 호적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로 인해 선생은 해방 이후에도 무국적자 신분이었고, 옥사하신 다음 유골이 고향땅에 도착했지만 무국적자라는 이유로 매장허가가 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암장했지만 이를 도왔던 면장이 파면되기까지 하였답니다. 


선생의 아들인 수범 씨는 독립운동가인 아버지를 밝힐 방법이 없어 강요된 사생아로 살면서 단재 선생의 아들임을 확인받기 위해 기나긴 법정 투쟁을 벌여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1991년 수범 씨가 사망하고, 선생의 며느리였던 이덕남 씨가 법정 투쟁을 이어갔습니다. 결국 유족들의 노력으로 2009년 2월 6일 독립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이 일부 개정(법률 9463호)되어 다음과 같은 규정이 신설되었습니다. 


제4조의2(가족관계 등록 창설 등)
① 제4조 각 호(순국선열, 애국지사)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독립유공자 중 구 호적 없이 사망한 사람에 대하여는 다른 법령에도 불구하고 대법원규칙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가족관계 등록 창설을 할 수 있다.
② 제1항에 따라 가족관계 등록 창설이 된 독립유공자의 자와 그 직계비속 또는 그 법정대리인은 독립유공자의 가족관계 등록 창설이 된 것을 안 날부터 2년 내에 검사를 상대로 인지청구의 소를 제기할 수 있다.


<가계도>


서울가정법원은 2009년 3월 13일 위 법에 따라 단재 신채호 선생 등 62명의 독립유공자에 대한 가족관계등록부의 창설을 허가하는 결정을 하였고, 2009년 3월 19일 그들에 대한 가족관계등록부가 창설되었습니다. 그러나 박자혜 여사는 현시점에서 단재 선생과의 법률적인 혼인 여부를 입증할 수 없어, 선생의 가족관계등록부 법률상 처로 기재되지 못하였고, 선생의 아들인 수범 씨도 선생의 자로써 등재되지 못하였습니다. 특히, 단재 선생과 아들 수범 씨와의 법적 관계가 끊어져 있었기에 단재 선생의 유족들은 상속이나 묘지이장 문제 등에서 곤란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결국 위 법적 단절을 이어주는 제도가 인지청구(갑은 부친 을과 모친 병의 친생자임을 확인한다는 취지)였는데, 단재 선생의 손자 상원 씨가 위 법 제2항에 따라 인지청구의 소를 제기하여 지난 8월 12일 원고 승소의 판결 선고가 있었습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하늘의 뜻에 따라 연결되고(父子天合),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의로써 연결된다(君臣義合)고 합니다. 


이렇듯 부모 자식은 자연이 맺어준 관계임에도 이를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하여 해방 이후 오랫동안 부모 자식이 아닌 것으로 살아왔으니 얼마나 답답했을지 모를 일입니다. 


특히 친일파의 후손들이 제도권 내에서 여러 가지 기득권을 누려 왔던 점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독립유공자에 대한 배려는 얼마나 있었는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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